시애틀에서나의 수면 시간은 하루평균 서너 시간뿐, 시차와 더불어 단순히 놀러 온 것이 아니라서 어수선한 마음에 잠을 설쳤다. 이런저런 일로 언제나 수면부족. 내가 미인이 못 되는 이유다.
비록 시애틀이지만 같은 미국이라 그런지 갑자기 폭풍처럼, 세인트루이스에서그녀들과 나누었던 추억들이 생각났다. 주기적인 가족 홈파티,핼러윈과 땡스기빙, 그리고 따뜻한 마음들.
뒤척거리다가 그녀들에게 이메일을 썼다.
나 지금 시애틀에 있어~너무 오랜만이지.
일 때문에 온 가족이 왔는데 미국이라 그런지 너희와의 추억이 생각나.정말 그때가 그립다...
당장 크리스틴과 그녀의 엄마 미시즈 비니에게 웰컴 답장이 왔다. 이츠코에게도.
크리스틴과 그녀의 엄마 Mrs.Bini, 이츠코의 따스한 답장들
이츠코와 크리스틴 그리고 나,
세인트 루이스의 삼총사로 지내던 우리들. 14년 전인 2008년, 남편 일로 미국에 왔다가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들이다.
크리스틴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아이들의 영어 튜터로 만났다. 작은 얼굴에 오뚝한 코, 쌍꺼풀진 커다란 눈과 옅은 갈색 머리를 한 여배우 필 나는 백인 여자.
사립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한 경력을 가진 도도하면서도 예의 바른 그녀가 첫눈에 맘에 들었다. 크리스틴은 어린 두 딸의 엄마라 그런지 아이들과 이내 친해졌고 수업 후 늘 피드백을 주는 좋은 튜터였다. 뿐만 아니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해서 수업 후에 피드백을 시작으로 세인트 루이스와 시카고의 볼거리, 나아가 미국의 문화와 쇼핑팁부터 서로에 대한 이야기까지 허심탄회하게 나누며 친밀해졌다.
이츠코는 어느 날, 우리 딸애가 가져온 편지를 보고 만나게 됐다. 일본인 특유의 조심성과 예의가 뚝뚝 묻어나는 영어편지. '쟈스민과 같은 반인 저의 딸 카나가 댁의 따님인 쟈스민을 너무 좋아하는데 허락해주신다면 쟈스민을 초대해서 놀아도 괜찮을까요? 편하실 때 답장 주세요.'
영어에 높임말 존댓말이 없다 해도 그녀의 편지를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딱 저런 느낌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별관심이 없었다. 길어야 2~3년 있을 예정인데 그 기간 동안만큼은 오로지 미국친구들과 영어의 바다에 풍덩 빠져 영어만 하다가 돌아갔으면~하는 욕심이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인들은 영어를 못하는 민족으로 유명하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애가 손해가 아닐까 얄팍한 계산을 했다. 그리고 이츠코의 편지에 어떻게 답장을 할까 하다가 곧 잊고 말았다. 남편을 따라왔으나 그 비자로는 1년밖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내가 학생비자를 받고 애들을 내 밑으로 두었다. 학생 신분이니 학교 다니고 살림하고 애들 학교 픽업에 아이들의 모든 학교 행사를 쫓아다니느라 매일 밤 녹초가 됐다.(미국 초등학교는 참~행사가 많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행사에서 이츠코를 만났다.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의 그녀는 수줍은 듯 내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카나의 엄마예요...
아! 잊었던 그녀의 편지가 생각나면서 나는 너무 미안한 나머지 그날 당장 학교 끝나고 쟈스민을 카나 집에 데려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카나는 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뛸 듯이 기뻐했다. 긴 머리에 마르고 우리 애보다 한 뼘은 키가 큰 예쁘고 활달한 아이였다. 일본유명회사의 간부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 이츠코는 아들 준과 카나의 튜터를 못 구해 절절매는 중이어서 내가 크리스틴을 소개했고 그렇게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크리스틴은 눈이 빨개져서 우리 집에 왔다. 그때가 아이티에 큰 지진이 나서 뉴스마다 아이티의 지진 참상에 대해 보도가 대서특필되었는데 크리스틴은 당장 아이티에 가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울먹였다. 나는 그녀의 진심을 보았다.
그리고 미국의 힘도 느꼈다. 많은 문제가 산적해있는 멜팅팟의 나라 미국을 지탱하는 선한 힘 말이다.사실 크리스틴의 둘째 딸도 과테말라에서 입양해온 아이였다. 첫째 딸을 출산하고 우리나라 말로 구안와사를 앓은 그녀는 임신 트라우마가 생겨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입양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의 합의에 의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과테말라 아기를 입양한 것이다. 둘째 아기는 피부도 검고 생김새가 가족들과 완전히 달랐으나 귀엽고 밝았다. 단 엄마 크리스틴과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튜터링을 할 때마다 애를 먹는다고 했다. 남편이 늦는 날엔 친정엄마인 Mrs.Bini 댁에 맡기곤 했다.
어쨌든 크리스틴은 아이티에 간다는 말로 나를 긴장시켰지만 이츠코와 내가 '우리 애들 튜터링은 누가 하냐'라고 매달렸다. 뿐만 아니라, 첫째는 5살 둘째 딸은 겨우 두 살, 집 근처에서 튜더링을 하는 두세 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두고 아이티에 가기엔 무리이기도 했다.
국적은 제각각이었지만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우리 모두 아이들이 둘씩인데 근심 덩어리 한 명씩 있는 것도 똑같아서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해 주었다. 남편과의 러브스토리, 친정 이야기, 시댁 이야기(특히 나는 할 말이 많았는데 억울한 이야기를 할 땐 신들린 듯 영어가 술술 잘도 나왔고 오! 마이갓을 외치는 크리스틴과 이츠코의 리액션에 신이 나 더욱 열을 올리며 내 사연을 발표했다)
다들 아이들이 어려 우리 셋만 즐기는 티타임은 드물었지만 대신 온 가족이 다 같이 만나는 홈파티를 자주 열었다. 먼저 크리스틴은 이츠코와 나를 자기 친정 부모님께 소개했다. 크리스틴의 엄마 Mrs.Bini는 한국 엄마 정서를 가진 미국인이었는데, 다 큰 자녀들을 늘 걱정하고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푸근한 분, 손주들 봐주는 일에 거리낌 없는 모습이 꼭 우리 엄마 같았다. 그녀는 우리를 크리스틴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종종 그녀의 두 딸과 함께 이츠코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샐러드와 미트, 파스타와 바삭한 빵과 잼, 음료를 준비해서 뷔페식으로 차려주고 디저트까지 대접해줬다. Mrs. Bini는 이츠코와 나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싶어 했고
우리 아이들에 대해서도 나중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가 됐다. 심지어 나중에는 우리 엄마에게도 손편지를 써서 보낼 정도로 큰 애정과 관심을 보냈다. (그 편지에 엄마는 매우 당황하셨다. 도무지 답장은 쓸 수가 없다고)
이후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끊임없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우리가 그 옛날에 나눈 이야기들 중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억해 물어보고 챙겨주어서 깜짝 놀란 일도 많다.
그 엄마의 그 딸이라고, 크리스틴은 나와 이츠코의 온 가족을 핼러윈 데이에 자기 집에 초대해 우리 애들을 그녀의 두 딸과 동네애들 사이에 끼워 넣어 trick or treat을 하게 했고 땡스기빙 때도 불러주었다.
핼러윈 때는 아이들 뒤에서 아빠들끼리 엄마들끼리 무리를 지어 모두 함께 이벤트에 참여했다.
매년 호박바구니가 넘치도록 사탕을 받아 들고 입이 찢어지게 함박웃음을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행복한 추억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크리스틴의 집, 크리스틴의 부모님네 집, 이츠코네 집 그리고 우리 집까지 네 집이 돌아가며 복잡하지만 신나는 가족모임을 달마다 한두 번씩은 가졌다.
마지막 나의 리터닝 파티 때는 크리스틴의 여동생 남동생네 부부와 아이들까지 모여 20명이 훨씬 넘었다. 크리스틴 덕분에 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이었던 이츠코 가족과 나의 가족들은 미국 문화를 속속들이 체험할 수 있었다.
남편이 일 때문에 한국에 먼저 돌아가고 1년을 아이들과 혼자 지냈던 시기, ( 역시 든든한 사촌 같았던 한국인 리따 언니 부부와 카타리나 부부를 비롯해) 이츠코 부부와 크리스틴, Mrs.Bini는 나와 아이들이 외롭지 않도록 신경 써 주었다. 그들 덕분에 나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빠 없는 빈자리를 느낄 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Mrs.Bini는 3~4개월마다 남편이 우리를 보러 올 땐 미리 날짜를 묻고 모든 가족을 소집해 꼭 홈파티를 열어주었다. ( 다시 한번 모두에게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남편이 없던 그 때, 나는 이츠코에게 큰 신세를 진 일이 있다. 언제나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에서 놀리는데, 컨디션이 안 좋던 둘째가 열이 급격히 오르고 호흡 곤란이 오는 것 같아 세이프가드가 911을 불러 병원을 가게 되었다.(우리 둘째는 항~상 아빠 없을 때만 사고를 친다. 허허...)
우리 아들을 싣고 삐뽀삐뽀 굉음을 내는 911차를 따라 나도 딸을 데리고 정신이 반쯤 나가 차를 몰고 따라갔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깜빡이를 켜고 엄청난 과속을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야 우리 모두 젖은 수영복 차림인 것을 알았지만 그대로 아이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 입원을 해야 한다는 병원 측의 말에 세상에 혼자 뿐이던 나는 일단 이츠코에게 SOS를 했다. 갑작스런 내 부탁에도 그녀는 30여 분 만에 따뜻한 음료와 주먹밥까지 싸서 달려와 나를 안아주고 걱정 말라며 딸아이를 데려갔다. 남편과 본인의 아들 딸 건사도 힘든 마당에 우리 딸 시중까지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세명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싸서 학교 라이드를 하고, 아침과 간식, 저녁까지 먹여주었다. 2박3일만에아들이 퇴원을 하고 나서 이후에도 집에 안 오려는 딸을 보며 이츠코의 배려와 따뜻한 정성에 감사했다. 얼마간의 돈과 선물로 내 마음을 간신히 표현했지만 지금도 너무나 고맙다.
이후 이츠코와 나는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진정한벗이 되었다.
3년 전, 마음의 갱년기로 힘들었을 때 집을 뛰쳐나가 제일 먼저 간 곳도 이츠코가 있는 일본이었다. (남편은 2주든 한 달이든 있다 오라 했지만 쫄보인 나는 고작 3박 4일을 있다 왔다. 후회막심 )
이츠코에게 '힘든 일이 생겼는데 나 일본 갈래, 시간 있니?' 하고 이멜을 하자 그녀는 모든 스케줄을 조정하고 호텔을 잡아주고 공항까지 나를 델러왔다. 꾸준한 안부는 주고 받았으나 내가 한국으로 먼저 귀국한 후 6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바람부터 했다. "그레이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나 역시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3박 4일 내내 50여분 거리의 집에서 기차를 타고 호텔에 와서 나를 데리고 긴자 거리, 도쿄 타워 등 일본의 명물과 쇼핑거리를 섭렵했다. 또 애주가인 나를 위해 매일 저녁 이자카야 맛집, 맥주집을 찾아 함께 술을 마시며 내 이야기와 푸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었다. 만능 살림꾼에 현모양처이자 실버센터의 영어 선생님인 이츠코는 정말 내게 과분한 사랑을 준 좋은 친구다. 내가 다녀가고 세 달 뒤엔 우리 딸아이도 자기 집으로 초대해 2박 3일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보살펴주었다. 이츠코의 딸 카나 역시 우리 딸을 데리고 도쿄 디즈니랜드를 비롯해 신나는 일본 탐험을 하게해 주었다.
(쓰다 보니 도대체 얼마의 신세를 진거야!!!)
나도 도저히 질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하는 친구들에겐 손해를 보면 봤지, 손톱만큼이라도 빚을 지기가 싫어졌다. 그다음 해, 나의 간청으로 이츠코는 결국 친구 유키코와 한국에 왔다. 이츠코가 혼자 왔다면 나는 안방이라도 내주어서 극진한 대접을 하려고 이미 남편하고 이야기를 끝냈는데 친구와 온다니 김이 샜다. 그녀는 북촌마을의 한옥집에 숙소를 잡았다. 나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모든 일정을 스탑 한 채 공항 마중부터 호텔 동행, 인사동 탐방, 남대문, 스파 체험, 종류별 맛집 탐험, 강남의 가로수길과 청담동 명품거리와 백화점 구경, 이태원 쇼핑까지 그녀들의 운전기사 겸 가이드로서 최선을 다했다.
결국 이츠코와 유키코는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며 눈물까지 흘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몸살이 나서 그로부터 이틀을 누워있었다...그래도 흐뭇하고 즐거운 기억이다)
시애틀에서 첫날은 비가 왔지만 이후 2~3일은 흐린 맑은 날들이 이어졌다.
시골이었던 미주리주 체스터필드보다 비교도 안되게 큰 스타벅스의 도시, 이곳에서 우리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애틀로 건너와 살고 있는 리따 언니 부부를 만났다. 14년의 시간을 거슬러, 세인트루이스 어딘가의 음식점에서 우리 두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데자뷔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날 밤이었나 보다.
리따 언니와의 만남으로 내 마음은 이츠코와 크리스틴과의 추억까지 소환해 낸 것이다.
미주리주에서 살았던 2년 반은 내 생애에서 가장 짜릿하고 행복한 시간이다.세인트루이스가 제 2의 고향이 되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