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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Feb 07. 2022

마취의 아이러니

수술한 곳은 아파야 정상이다

지난해 담낭절제술을 했다. 소위 값싼 말로 '쓸개 빠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1~2년에 한 번씩 건강 검진을 받는데, 복부초음파에서 0.5미리의 용종이 있다고 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조금씩 커졌다. 다음 해엔 0.7, 그 담엔 0.8 그리고 2년이 지났더니 1센티가 됐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담낭은 허리 쪽에서 가까울 만큼 안쪽에 있어서 자라는 용종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즉 조직검사가 불가능하고 1센티가 넘으면 암이 의심되니 무조건 떼어버리는 게 정석이라는 거다.

교수님은 뭐 두고 볼 것도 없다며 빨리 수술 날짜를 잡자고 하시고 나는 일단 아무 통증도 더부룩한 것도  없고 소화력도 우리 애들만큼 좋아 미루고 싶었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 해도 며칠 입원하고 한동안 고생하기 마련이니까. 증상이 있으면 당연하지만 아무 증상 없이 수술을 하려니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 의견을 물어보니 이왕 뗄 건데 하루라도 찜찜하게 가지고 살 필요가 있냐, 하루라도 젊을 때 수술하는 게 좋다는 말이 그럴듯해서 떠밀리듯 수술 날짜를 잡았다.

코로나가 극심하던 작년 초라, 소위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고는 아무도 병원에 같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혼자 접수를 하고  혼자 입원했다. 어쨌든 서러웠다. 남편은 저녁에야 나타났다. 




입원 전날,  입원 당일,  수술 당일 세 번이나  코를 찌르는 의식을 거행하고  드디어 수술실로 입성.

가족 중 한 명이 특별히 부탁을 넣어준 덕분인지 한기가 확 느껴지는 수술대에 누워  마른침만 삼키는  내게 누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는 척을 해준다.  두려움은 살짝 가벼워졌지만  양쪽에서 내 팔을 잡아 혈관에 주사를 찌르고 약을 넣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빨리 마취되기만을 기다렸다. 옷을 벗기고 (앗 창피ㅠㅠ) 수술부위만 뚫린 초록색 수술포를  덮어준다.

교수님이 들어오시는가 싶더니 코와 입에 마취 마스크가  씌워지고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통해 흘러 들어온다 . 조금씩 몽롱해지면서 안 자려고 버티는 그  순간까지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아웃된다. 


"괜찮아?? 안 아파?."

 남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근데 수술은 진짜 한 건가?  좀 어리둥절했다.

수술을 했으면 통증이 당연한 건데 아프지가 않았다.

뭐지?? 이렇게 하나도 안 아플 수가 있나 신기했다.

걸어서 뛰라 해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남편이 재차 아프냐고 묻는데,  아프다고 낑낑거려야  동정이라도 받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치며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수술을 했는데 아프지 그럼. 아 아파 아파"

그랬더니 남편이 아프면 누르라면서 수술실에서 달고 나온 진통제 통을 쥐어준다. 누르면 찍~하고 일정량의 진통제가 발사되는 주사기.

맞아! 지금은 안 아프지만 혹시 금세 아플 수도 있어.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나는  저금하는 마음으로 진통제 스위치를  꾹 눌렀다.


병실에 왔는데 낼 퇴원해도 될 만큼 기분이 좋았다.

 남편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하는 전신 마취에 수술 후 아프지 말라고 복부 마취를 친절하게 한번 더 해주시고(물론  서비스 아니고 내 돈 내산)  게다가 진통제까지 달고 나왔으니 수술 부위가 3중 마취로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VIP 대접인가 싶었다.


어쨌든  수술했는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다니, 눈부신 의학의 발달에 경의를 표하며  병실로 온 직후부터  가족들과 친구들과 톡을  하고 까불었다.  저녁  식사로 나온 죽도 맛있게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다음 날이 되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면서  심한  VIP 신드롬이 찾아왔다.

교수님이 수술은 매우 잘됐지만 오늘부턴 무조건 많이 걸어야 한다고, 많이 걸어야 폐렴 안 생긴다고 회진을 돌고 가신 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고 세상이 빙빙 돌아가고 토할  같고 나중엔 머리를 베개에서 뗄 수가 없었다.

정말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 듯한 구토와 두통이 점점 심해지는데  아프단 말조차 안 나왔다.


통증을 없게 하고자 때려 부은 마취약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담낭 절제한 복부 부위만 빼고 나머지 모든 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누워있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모든 게 지옥훈련 겪듯 힘들었다. 걷기는커녕 앉아있지도 못하니

열이 올랐다. 열이 오르면 뭐한다? 또! 코로나 검사를 위해 코를 찌른다. 코로나 검사 수십 번 해도 좋으니 두통만 사라지길 바랬다.

식사 시간마다 밥은  나오는데 당연히 물 한 모금 넘기지도 못하고 몸부림만 쳤다.


이 모든 해결책은 오로지 걷기라고 했다.  몸에 쌓인 마취약의 독을 내보내는 방법이  내가 움직이는 것 뿐이라니....마취를 시키는 약은 있는데  푸는 약은 없다니...이번엔 갑자기 의학의 발달에 의문이 들었다.


오만상을 하고 남편과 딸과 걸었다. 그러나  병동  하나도 돌지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휠체어를 타보기도 했지만 구토가 나와 그것도 힘들었다. 투덜이 감이가 한마디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조금씩 걷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통도 구토도 아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담낭 용종의 정체는 못된 식습관으로 인한 콜레스테롤 덩어리였다. 사실 수술 전 그 정체를  알았다면 아마도 수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소맥과 치킨, 각종 튀김류, 바싹 구운 고기와 쌀밥,  라면  그리고 외식과 더불어 늘 과식을 사랑하는 나에게  그 결과가 그냥 콜레스테롤 덩어리로  끝난 것에 너무나 감사한다.


퇴원 후에도 고통과 아픔의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때때로 담낭을 뗀 자리의 통증이 뱃속 가득 차올랐고  허리를 펴면 아파서 구부리고 다녔다.  또  2주 정도는  웃거나 기침이 나올 때마다 창자가 뒤틀리는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 쿠키와 크림이도 놀라고 가족들도 다들 근심어린 얼굴로 들여다볼 뿐, 아픔은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먹으라고 진통제도 처방받았지만 혹시 또 두통이나 구토 같은 부작용이 올까 봐 세 번 먹을 진통제 두 번만 먹고 버텼다.

너무 아플 땐 소리 지를 힘도 없어져 조용해진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답지 않게 웅크리고 끙끙 앓기만 했다.


수술 이후의 당연한 통증을 참기 위해 '안 아프게 해 주세요~'를 입에 달고 살다가 결국 마취약으로  미뤘던  통증이 얼마나 더 큰 통증과  고통으로 덮쳐오는가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


비단 수술뿐일까.

당장의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고 미루는 일들이 나중엔 어떤 쓰나미로 덮치는지  우리는 수도 없이 경험해왔다.

고통이 올 땐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겠다. 왜냐면 그것이 견뎌낼 수 있는 제일 작은 고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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