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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이 Feb 06. 2022

명절을 내 원가족끼리 모이는 날로!

명절의 재정립을 외쳐본다.

결혼한 지 24년 차, 남편은 장손이다. 둘째 아들이었던 우리 친정아버지는 큰 집에 명절 당일 오빠들과 엄마하고만 가셨다. 명절 오전은 언니와 나는 늘어지게 자는 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사 지내는 모습은 그림에서나 봤을 뿐, 제사 준비과정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


결혼해서 당분간은 시어머니가 대부분 제사 준비를 도맡아 하셨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우며 차리는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고 시키는 일만 하는데도  온몸이 아팠다.

제사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제일 신기했던 건 절 한번 할 때마다 떡국과 담는 그릇, 수저 젓가락까지  모두 싹 바꾸면서 나르는 일이었다. 둘  둘 ㅡ총 여섯 그릇의 떡국과  수저 젓가락 세트가 나갔다 들어왔다.  영혼들 다녀가시라고 현관문도 열어놓고 다 같이 진지하게 절을 하고,  많이 드시라고 불도 끄고 심지어  자리도 비우거나 돌아앉아 있는다.  배울 만큼 배우고 나이도 있으신 분들의 진지한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21세기에 조상을 기리는 절차가 좀 토테미즘스럽다 해야할까.

중에 남편한테 물었다. 누구한테 절하는 거냐고 하니 증조할아버지 이상은 누군지 모르고 절을  한다고 했다. 열심히 따라서  절하는  우리 아들이나  나나  얼굴은 물론 성함조차 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다.

최소 한 달 전부터 며느리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몇 날  며칠 음식을 준비하고  여분만에 끝나는 이 제사가 시간이나 비용면에서 너무 덧없어  보이는 허례 의식 같았다.

시어머니는 행여나 내가 제사에 정성을 다하지 않을까 봐 항상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왜 이렇게 정성스럽게 하는 줄 아니?  다 내 자식 잘되라고 이러는 거다."

제사 열심히 지내서 자식이 잘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다면 이 세상에 '명절 증후군'이란 말이 생겨났을까? 제사에 내 자식을 볼모로 잡는 그 말씀에 진심 수긍할 수 있는 착하고 순진한 며느리이고 싶은데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 하던 일도 놓고 싶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복 받을 거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보통 내가 하기 싫은데 싫다는 말은 못 하겠어서 억지로 했거나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있을 때 주위에서 흔히 주고받는 말이다.

내가 좋아서 한 선행이라면 복을 바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억지로 한 일이라면 의도가 선하지 않은데 복을 받을 일도 아니다. 단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는 게 인생이니 좋든 싫든 그냥 묵묵히 할 뿐이다.

내키지  않은 일들을 하는 것은  건강에 안좋으니

복이라도 받는다는 생각으로  작은 위안삼자는

'우리끼리 토닥임'일 뿐이다.




어쨌든 제사에 자식의 미래까지 거는 시어머니에게 그 의미가 어떨지 가늠도 안돼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제사를 안 지내려는 꼼수를 피워본 일은 없다. 애초부터 전혀 맞지 않았던 시어머니지만 제사만큼은 지켜드리고 싶었고 10년 전에 제사를 넘겨주셨을 때 저항없이 받았다. 처음엔 너무 빨리 받은 것  같아 속이 좀 상했지만 막상 제사를 넘겨받고 보니 편한 것도 있었다.  일단 남편에게 도움의 손길을 부탁했다.

"자기야, 이 제사는 자기네 집 제산데 얼굴도 모르는 내가 준비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후손이 같이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게 이치에도 맞고." 남편도 수긍이 갔는지 제사상에 올려지는 음식들 중, 사는 것으로 끝나는 밤, 대추, 물김치, 각종 5~6가지 종류의 과일들, 약과, 한과, 명태, 술  등등은 남편이 전부 사다 나른다.

어머니는 혹시나 게으른 내가 제사에 소홀할까 봐 모든 종류의 고기를 사서 집으로 보내 주신다.

나는  그 고기들로 국을 끓이고 나물을 하고 갈비찜과 돼지고기 수육, 두부 굽기, 고기산적을 한다. 우리 집으로 제사가 옮겨진 후 동서도 신이 났다. 늘 어머니 집에 일찍 호출을 당했던 동서에게 나는 명절 전날도 올 필요 없고 대신 전과 조기를 사 오고, 잡채 정도만 해오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너무 기뻐했다. (뭐 잡채까지  사온 대도 상관없다)


명절 두 번에 그간 여러 번 있던 제사를 합해서 한번 더, 일 년에 세 번의 상차림을 한다.

그래도 우리 집으로 제사를 옮긴 후 나는 명절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들었다. 생각해보니 문제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댁에서 제사를 지낼 땐 두 시누 모두 명절 당일 오전보무도 당당하게 들이닥쳤다.  두 집 합쳐 5명의 아이들 줄줄이, 그리고  한 집은 남편까지 대동하고 느지막이  나타나 식당 온 듯 밥을 얻어먹었다.

친정에 오빠가 둘이지만 나랑 언니는 며느리 두 명이 일하는 집에 온 식구 함께 가서 앉아서  받아먹는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제사를 끝내고 이른 아침을 차려 먹은 후면

(오려면 일찍 오든가) 아점을 먹으러 온  7~8명 되는 시누 가족들을 위해  또 밥상을  차리고 조금 있다가 또 다 같이 먹는  점심을 차려야 했다.(쓰다 보니 침잠했던  분노가... )

 게다가 차려진 밥상 감사히 받아먹으면 중간이나 갈 텐데 아주 큰소리로  "엄마 엄마 어제는 시댁에 갔는데 뭘 시켜먹으려 했더니 문을 닫아서 다른 걸 시켜먹었고  오늘은 여는 데가 없으니 친정 와서 먹는 거야." 하며 종업원처럼  찍소리 안 하고 일하는 나와 동서의 염장을 지르는 얌통머리 없는 시누도 있었다. ( 나이가 무려 나보다 5살이나 더 많고 손아래 동서와는 열 살도 더 차이나는 그녀,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걸까) 그 말을 들은 동서와 나, 말은 안 해도 어이없는 웃음으로 천 마디 욕을 삼켰다.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동안에도 그녀들은  엉덩이 한번 떼지 않고 마치  식당에 돈 내고 서비스받는 손님처럼 굴었다. 특이한건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할 줄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저 집 딸들보다  * 세속적이든 그 무엇이든 따져도*  귀하게 자랐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극한 체험을 해야 하는  건지 정말 이해 불가였다. )

문제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 누구하나  그녀들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그게 더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제사가 내 집으로 온 이후 시누들도 눈치가 보이는지, 지난 세월 속상한 일들을 연거푸 당하다 보니 안보이던 게 보이는지  먹는 시간은 피해서 왔다. 또한 시어머니도 당신 집이 아니니 어서 밥상 차려내란 말씀도  잘 못하셨다.

그리고 코로나로 시어머님이 조심 차원에서 아예 오시지 않자 제사는 아버님과 동서네 그리고 내 가족만 참여하게 되었다.  (밉기도 예쁘기도 한 코로나)




시간이 흐를수록 탈 많고 말 많은 명절문화,  과연 좋은 방법은 없을까? 

더군다나 지금 40대 이하 여성들의 사고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취적이고 기존의 명절 문화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남녀평등이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의 대접과 교육을 받고 자랐고  학업면에선 남자들보다 우수한 인재로 자라난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우리 때처럼 참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에 제사는 이제 그 존립 자체가 아슬아슬해진 지 오래다.


내 생각은 간단하다. 결혼 이후 각자의 원가족,  같은 혈통끼리만 모이는 일은  사라져 버렸는데 명절은 내 가족끼리  지내는 특별한 날로 지정하는 것이다. 흩어졌던  혈연들만 모여  얼굴 보고 자기들만의 조상님을 기리는 날로 하는 것이다.   내 부모님과  내 형제들만 딱 모여서 예전 추억 나누고 즐겁게 지내는 시간을 갖는다는 건 정말 흥분되는 일 아닌가?


 만일 부모님을  위시해 내 가족만 모인다면, 단언하건대 그곳엔 남자 역할  여자 역할도 따로 없을 것이고 십 수 가지 손 많이 가는 제사 음식도 사라질 것이다. 매우 합리적이고 다 같이 웃고  즐기는 기발한 방법들이  금세 생겨날 것이다.

내 가족끼리 즐기는 휴가패키지부터  추억돋는 과거 여행지 패키지,  새로운 외식코스까지

생겨나지 않을까?  작은 상상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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