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바하마에 가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더불어 가슴도 쿵쾅거렸다.
바하마?
바하마 제도라 불리는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던 곳, 예전에 미국에 머물렀을 때 마이애미에서 출발하는 크루즈 여행을 하다가 잠시 배를 정박해두고 '나소'라는 도시를 걸었던 잠깐의 기억밖에 없는 그곳! 이후로는 머나먼 거리만큼 관심도 멀어졌지만 막상 들으니 신비스러워서 가보고 싶은 나라.
남편의 개인적인 일정이 있기도 했지만 때는 6월 초, 코로나 제한이 풀려 가파르게 늘어난 해외여행객 수를 비행기 편수가 따라가지 못한 데다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유류할증료가 올라 비행기 값이 사상 최대로 비싼 시기였다. 또한 바하마는 멀어도 너~무 멀어서 오갈 때마다 미국 본토에서 1박을 해야만 하는 일정이었다. 비행기 가격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진 나는 아쉽지만 안 가겠다고 했다. 지난 18년에 갈 수 있는 바하마 비행기 값과 비교해보니 세배의 가격이었다. 소탐대실형인 나는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돌아가고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나쁜 성향인 걸 알아도 고치기가 어렵다. 그렇게 큰돈을 하늘을 나는 데 뿌리기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비니지스 클래스 가격의 이코노미를 타고.
아마 또 기회가 있겠지. 있을 거야... 바하마는 아마 다신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지만 애써 위로했다.
그런데 엄마 언니 친구들의 생각은 나와는 반대였다. 무조건 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쉽게 갈 수 없는 여행지는 기회가 왔을 때 빚을 내서라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남편과,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인 몸과 마음을 가지고 그 멋진 곳에 가는 기회는 나중엔 수천 만원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듣고 보니 그깟 돈? 이 대수냐 (대수긴 하지) 싶었다. 역시 내 주변 사람들은 나보다 지혜롭고 현명하다.
눈을 딱 감고 여행 준비를 했다. 또다시, 연로하신 친정엄마와 언니에게 쿠키 앤 크림이를 부탁했다. 우리 애들이 어릴 땐 애들을, 이제는 쿠키 앤 크림이까지 품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엄마와 이웃이기도 한 친정 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어쨌든 엄마가 쿠키 앤 크림이를 위해 와 계시기로 허락하면 여행 준비의 반은 끝난 거라 부쩍 가벼워진 새털 같은 맘으로 신나게 짐을 쌌다.
바하마의 아틀란티스 리조트, 우리가 머무를 곳이었다.
*바하마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 연방의 독립국, 정식 명칭은 바하마 연방 공화국.
미국의 플로리다 남동쪽에서 히스파니올라 섬에 이르기까지 약 800킬로에 걸쳐서 약 7백여 개의 섬과 2천여 개의 산호초로 된 바하마 제도지만 이 중 사람이 거주하는 섬은 30여 개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최초로 신대륙에 상륙한 지점이 이곳의 산살바도르 섬이라고 한다.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가 1783년부터 영국의 영토가 되었고 1964년 자치국이 되었다가 마침내 1973년 7월 독립하였다.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공용어는 영어이며 통화는 바하마 달러인데 환율은 미국의 환율과 같고 인구 구성은 흑인 85%, 백인이 12% 아시아 스페인계 3% 정도다. 수도 낫소가 있는 뉴프로비던스 섬에 인구의 2/3가 산다.
(이상 출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97964&cid=40942&categoryId=34137)
수없이 많은 바하마의 섬들 가운데 수도 '나소'가 있는 뉴프로비던스 섬과 연결된 파라다이스섬에 그 유명한 아틀란티스 리조트가 있다. 나는 '아틀란티스'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인류가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곳으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록에 의해 전해지는 전설상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떠올라 더욱 꿈에 부풀었다.
십수 년 전, 여느 관광지와 별다를 것 없는 나소의 거리를 걸으며 바하마 섬에 발을 닿았었지 했는데, 이젠 진짜 바하마를 만나러 가는 기분에 들떴다. 원래 여행은 가기 전이 젤 신나는 법.
어차피 미국 본토에서 하룻밤 들렀다 가는 거라면 뉴욕을 경유하기로 하고 뉴요커가 된 카타리나에게 연락을 했다. "바하마 가는 길에 하룻밤 뉴욕에 있을 예정인데 볼 수 있을까?" 카타리나는 흔쾌히 오케이 했고 나는 더욱 즐거워졌다. 카타리나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을 때 한인 성당에서 만났던 친구다. 한국 대학병원에서 안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녀의 남편은 보다 깊은 학문적 성취를 위해 미국에 왔다가 아예 레지던트부터 수련하게 되었다. 오랜 고생과 공부와 수련을 끝내고 카타리나의 남편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스카우트되어 당당히 뉴욕에 입성한 것이다. 한국에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곡들을 작곡해 본인 말로 돈**을 하며 살던 카타리나는 개인적 성취와 욕망을 내려놓고 그 긴 시간 동안 두 아들을 키우고 내조에만 전념했고 마침내 남편은 성공했다. 그런 카타리나를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그녀의 집에 나 역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바베큐를 해 먹고 밤새 수다를 떨고 먹고 마시던 기억들이 언제나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시애틀의 리따 언니 부부와 카타리나 부부 덕에 나의 미국 생활은 늘 시끌벅적하고 추억이 넘쳐났다. 남편이 먼저 한국에 돌아갔을 때나 어린 딸아이를 몇 달 두고 왔을 때나 그 바쁜 와중에 우리 가족들을, 딸아이를 물심양면으로 챙겨주던 고마운 친구, 실은 두 살 어린 동생.
귀국해서도 때때로 전화를 하면 웃음과 수다가 끊이지 않는 카타리나, 십 수년이 흘렀지만 그 사이 12년에 그녀가 잠시 한국에 와서 만났던 것을 빼면 10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뉴욕과 바하마, 카타리나와의 만남과 신비로울 것 같은 아틀란티스 리조트에 대한 기대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엄마는 5월 29일에 우리 집으로 모셔오고, 5월 30일 새벽 남편과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 그런데, 나는 타자마자 내 옆자리의 승객 때문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