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기장

결국 하나님 이야기

by 우조


“우조야, 멸치볶음 다 먹었으면 와서 또 가지고 가렴”


전화를 받고서 밑반찬을 가지러 친정집에 들렀다. 독립하기 전 내 방은 이제 부모님의 서재가 되었다.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동안, 나는 그 방에서 한동안 서재를 구경했다. 책등을 쓰다듬어보다가 문득 저 구석 칸 오래된 앨범들 사이, 빛바랜 노트에 눈길이 멈췄다. 조심스레 첫 장을 들춰보니 이름은 없고, 다만 ‘1993년, 오월’이라 적혀있다. 다음 장은 또 텅 빈 여백, 또 한 장을 넘겨보니 이제 알겠다. 엄마를 닮은 작고 정갈한 필체. 하루 혹은 이틀마다, 혹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볼펜으로 적어 내려간 일기였다.

‘흠...’ 더 넘겨볼까 말까 고민하던 중, 내 눈은 어떤 단어에 꽂혀 휘둥그레졌다.


_1993년 5월 2일

주님, 그럼에도 저는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워매? 이혼이라니... 이건 무슨 말이지?’

오늘 아침에도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으로 가족카톡방을 도배하던 2025년 현재의 엄마, 그리고 아빠가 떠오른다. 이제는 연로하신 두 분이 기나긴 세월 일관적으로 보여준 묵직한 사랑, 그 감동이 바사삭 부서진다. 내면에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행보가 복잡하게 교란을 일으킨다. 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작심을 하고 나머지 페이지들을 들춰본다. 혹시라도 엄마가 들어오시기 전에 속독해야 한다.


‘그럼에도’라는 말속에 담긴 그녀의 서사가 어떠한 것인지를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여기 담긴 글들은 필경 그녀가 깊은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뱉어낸 독백의 모음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2025년 지금의 나는 그 시절 엄마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버렸고, 본능적으로 삶의 문해력이 발동하여 깨달아버렸다. 살아가는 동안에, 누구에게나 ‘그럼에도’의 사연이 있고, 그 접속사에 기대어 제 삶의 신념을 지켜가려는 몸부림이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시작한 일기의 서두는 곧잘 주님 앞에 부르짖는 절규로, 고단한 삶에 치여 상한 마음을 가득 토해내는 울분으로 끝났다. ‘그럼에도’라는 말에 숨겨진, 그녀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다가온 현실은 무엇이었나, 슬픔에 짓눌려 헐떡거리던 엄마의 숨소리가 먼 훗날이 된 지금의 내게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페이지마다 주 앞에 은밀하게 풀어놓은 그녀의 고유한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하루는 이렇게 쓰여있다. ‘입 안 가득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모래를 잔뜩 머금고 있는 것만 같은 날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제 안에서 소화되지 않아, 저 또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도 버겁습니다. 저를 한시라도 빨리 데려가 주소서.’ 도망자의 신세로 이제 그만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청하던 엘리야의 기도를 붙들고는(왕상 19:4) 큰 위로를 얻었다면서, 엄마 또한 죽음을 절절하게 소망한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는 어김없이, 생명의 말씀으로 시선을 전복시킨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고백이 가득하다. 시편 기자의 고백(시 118:17)처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절마다 글 속에 나타난 엄마의 영혼은 생사의 기로에서 엎치락뒤치락 분투하며 매우 바빠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주하게 반전을 거듭하시는 움직임이 명징하게 보였다. 이것이 날마다 그녀를 사망의 그늘에서 건져 올린 듯하다. 여러 날 글 속에서 엄마는 사무치게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 버거워 끝내 포기하고 싶다던 소망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자아가 스스로 길을 결정하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닥쳐오는 삶의 고난으로 금세 휘청거리며, 의심과 불신으로 포기를 일삼던 그녀를 끝까지 붙드시고, 다시 일상의 자리에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분이 끝까지 추격하시는 은혜 때문에.


다른 어떤 날의 일기에 ‘그저 주님 앞에 이렇게 철퍼덕 주저앉아 우는 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사방을 아무리 헤매도 결국 종착지는 여기입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본다. 그 일기장은 엄마이기 이전에 주님 앞에 성도인 그녀의 세계를 지탱해 주던 생명줄과도 같았다. 때문에,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기도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부패하지 않았다. 수신자를 주님으로 하여 그녀가 써 내려간 글들은, 생명의 말씀에 닻을 내린 기도였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고백은, 결코 낭만적이라고,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는 말이다. 죽음을 통과한 이들이, 비로소 그 길을 이미 앞서 가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토해내는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엄마가 거실에서 나를 부른다. 서둘러 마지막 장을 펼쳤다. 평소에 창세기를 읽을 때면, 그냥 지나쳤던 부분이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일이니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창세기 24:40) 말씀을 적어놓은 엄마는 이어 이렇게 적었다. ‘아브라함의 종에게 라반과 브두엘이 말한 이 대답 앞에서, 저는 한참을 머물다가 결국 그 말씀에 매여 버렸습니다. 제 앞에 당도한 고통 앞에서는 그저 이 모습 그대로 주님만 찾으며 고통스러워할 수 있을 뿐이며, 환난 날에는 그 아픔 그대로 절규하며 부르짖는 것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주 앞에서 저는 그저 자녀이니까요, 주님이 저를 외면하시지 못하니까요. 저는 주님이 사랑하는 딸이니까요. 그저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나온 일이니,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지켜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 생명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한참 읽다 보니 묘하게 누군가와 닮아 있는 글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내 일기와 흡사하다. 그럼 내 인생의 결말도, 미래도 이제는 훤히 보인다. 과연 말씀의 약속대로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매 순간 나와 함께하신다. 내가 누리는 생명을 이웃에게도 전하라고 하신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평범하나 비범한 성도의 삶을 살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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