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민들레가 점령했다’

사실은 ...땡땡땡 이야기

by 우조


차가운 겨울밤, 어둠이 내려앉은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득할 만큼 깊다. 고요하게 내려앉은 달빛은 기꺼이 밤의 산책자들을 비춘다. 나는 잠시 머물러 서서, 온종일 육아라는 이름으로 삼남매들과 부대낀 하루를 떠올린다. 아까 그 현장에서는 분명히 독처하고 싶은 갈망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홀로 선 지금은 어쩐지 홀가분하면서도 쓸쓸하구먼. ‘아, 춥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돌아가려는데, 저 구석에 초연하게 서있는 노란 빛이 보인다. 거칠고 차가운 시멘트 벽 사이를 비집고 나온 민들레였다.


막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그 눈높이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땅의 세계가 보였다. 잡초라 여겨지는, 흔하고 시시한 노지의 민들레와 작은 생물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아이의 작은 발은 으레 가는 큰 길 말고도, 그 사이 여러 갈래로 난 골목길을 신나게 딛고 다녔다. 어느 날엔가, 이따금씩 시야에 들어오는 길가의 민들레 를 따라 우리만의 지도를 그리며 걷고 있었다. “엄마, 여기도 있네, 오! 저기도 있어요!” 노란 들풀을 발견한 막내의 신나는 외침은 계속되었다. 콘크리트 바닥이건, 시멘트벽의 깨진 틈 사이, 심지어 하수구 옆까지 우리가 밟는 땅 어디든 길이 난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피어있던 민들레. 아이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내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엄마, 사실은 민들레가 이 세상을 점령한거야!” (막내의 세계관은 다이소에서 산 장난감 총으로 세계를 재패하는 전쟁과 평화였다). 그렇다. 이 차갑고 단단한 돌땅 아래의 세상은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뿌리내린 그들의 구역이었던 것이다.


내게도 이렇게 민들레 같은 사람이 있다. 중1때, 방학숙제를 위해 방문했던 발달장애인복지관에서 경아(가명)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 그녀는 목에 장애인복지카드를 걸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고 수줍게 웃더니, 내 손을 덥썩 잡고는 어색하게 악수를 했다. 이어 들뜬 목소리로 “반갑다! 고맙다!”고 외쳤는데, 그 말이 그녀의 입모양보다 한 박자씩 늦게 발화되었다. 자음의 말들이 턱에 걸려 넘어지듯 흩어지고, 허공에 부서진 말들은 애매한 모음으로 들렸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함께 복지관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친해졌다. 시간이 날 때면 자주 만나 수다를 떨었다. 경아의 느리고 부정확한 말들은 점차 내 마음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사전이 되었다. 그녀는 주관이 뚜렷하고 독립적이어서 도움보다도, 모험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를 원했다. 여린 목소리와 작은 체구와는 달리, 내면이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경아라는 세계를 통해 부지불식간 내 인식이 점차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열네 살의 나는, 경아의 지적장애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존재가 내 삶에 들어왔고, 우리는 많은 길을 함께 걸으며 소소한 희노애락을 공유했을 뿐이다. 그러나 종종 길 위의 불특정한 타인과의 마주침 가운데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경아를 바라보는 조금 다른 시선과 눈빛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홀로 편하게 걷는 길이라면 몰랐을 감정들이 밀려왔다. 타인의 작은 배려와 환대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날도 있었지만, 많은 날들을 경아의 손을 잡고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경계하며 걸었다. 어떤 날은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뭔지 모를 환멸을 느끼기도 하고, 세상이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방식과 낙인에 대하여 깊이 분노하기도 했다.


경아와 함께할 때마다, 소용돌이치는 변덕스러운 마음들이 생겼다. 항상 그녀를 도와야한다는 강박과 그럴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사랑 없는 마음에 스며든 자괴감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있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리고 바쁜 일정을 핑계로 자주 그녀를 잊어버렸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바닥을 마주했다. 경아를 신실한 애정으로 대할 수 없던 나의 이기적인 본성과 인색함을, 뼛속 깊은 죄의 본능을 발견했다. 씁쓸해하는 나를 보고 친한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선배, 전 아침마다 지옥철을 타면 말이에요, 그리고 출근을 해서 직장에서 버티는 그 하루가 말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공존의 세계에 억지로 밀어 넣으시는 느낌이 들어요. 타인이 우글거리는 그 공동체로 말이에요”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함께 존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유의 작은 아기 예수님을 떠올린다고 했다.


사실 예수님의 발걸음이 닿는 성경의 모든 장면이 그렇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눅15:1-2), 키 작은 세리 삭개오와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던 여인과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에게, 이 땅의 부정한 모든 존재에게 예수님은 먼저 찾아오셨고 함께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런’ 나와 함께 공존하신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고자 하셨던 일들을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셔서, 초대하시며 부르신다. 오늘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의 눈을 맞추고, 귀를 열고, 우리의 몸짓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환대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나는 여전히 미완의 사랑으로 자책하지만,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괜찮다고 하신다.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 경아는 일관적으로 나의 존재를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우리가 마흔이 된 지금까지, 그녀가 긴 시간을 통해 몸소 증명해준 공존의 삶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분과 가장 닮은 모습(사53장)으로 내 삶에 찾아온 경아를 통해, 나를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세워주신다(엡4:1-3). 홀로 편하고 싶은 자아를 떨치고, 미안함도 떨치고, 여전히 열네 살 순전한 우정으로 나를 기다리는 경아를 고마운 마음으로 만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영혼에 깊은 안도감이 스며든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갈수록, 그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은 온전히 그녀와 같은 이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될수록, 기분 좋은 질투가 일렁인다. 그렇기에 민들레 같은 경아 옆에, 오래도록 붙어있을 예정인 나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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