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은...사랑과 우정사이 좋아하네, 교회다니는 청년들 잘들어봐
주일 저녁 예배 후, 로비를 가득 채운 청년들이 둥글게 모여 기도모임을 한다. 그 낯빛이 레몬처럼 상큼하고 은혜 듬뿍 발그레하다. 어쩜 그렇게도 귀하고 고운지:)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저 시절에 뭐했지?’ 자연스레 떠올려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다함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어떤 친구는 방금 태어나서 응애응애 울다가 응가만 싸도 우쭈쭈, 박수와 헹가래 환영을 받고. 또 누군가는 막 시작된 사춘기로 마음이 욱신거리는 몸살을 앓고 있었겠지? 그 때 새내기 대학생이던 나는 뭐했게요. 교회 기도실에 있었다. 갑자기 부담스럽게 거룩하지? 뭘 기도했을까. 적막한 가운데 단전에 힘을 모아 절규했다. “주님! 그 오빠랑 저는 어찌되겠습니까! 제발 답을 주소서!!” 그렇다. 나는 그 시절 ‘교회오빠’를 좋아했던 것이다(거기다 학업까지 병행하느라 너무 바빴다). 내 짝사랑의 텐션은 기도실을 뒤흔들 만큼 홀로 웅장했다. 호감의 시절은 일상이 활기찬 법, 그 간지러운 설렘에 기대가 점점 커졌다. 마침내 서로 연인이 되는 것만큼 바람직한 해피엔딩은 없다고 생각하던 망상도 정점을 찍었다. 이 시점부터 폐인이 된 것 같다. 먼지처럼 스쳐 지나갔는데 나 홀로 하루가 마구 들썩이고. 그의 언행이 내 정신마저 지배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실실 웃음이 나고, 어떤 날은 마음이 해저 만 리에 쿵 내려앉았다. 가슴이 시리고 심장이 따끔거렸다. 자주 청승을 동반한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다 속상한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사랑이 이루어질까? 내 바램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현실과 바램의 불일치를 용납할 수 없던 나는, 이 부분만 해결되면 삶에 진정한 평안이 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때부터 매일 내 바램을 한 보따리씩 들고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 오빠와 이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변곡점의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음이 바짝 달아오른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OX푯말을 드리고 대답을 요구했다. “아니, 진짜 주님? 저 그 오빠랑 성사 되는거 맞아요? 맞다고 해주세요~! O,X중에 시원하게 O를 달라구욧 제발!” 이렇게, 어느 날은 “주님 이번에 그 형제랑 안 이어주면 저 진짜 절망할거에요. 저 제대로 삐뚤어집니다.” 하면서. 억지, 변명, 회유, 협박 등의 방식으로 내 맘에 흡족한 상황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지던 날. 그 교회오빠는 비밀리에 교제한 자매와 결혼 발표를 했다. 온몸을 관통하던 헛헛한 마음, 씁쓸하기도 하고, 결론이 나서 후련하기도 하고... 그 마음 그대로 기도실에 갔다. 그동안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제목을 쏟아낼 때는 몰랐는데,, 뭐랄까, 고요한 중에 참고 있었던 눈물 한 방울이 툭..(이후 기도실 무너질 듯 대성통곡 한 시간). 그러고 나니 배도 너무 고팠다(가지가지 했습니다). 간구할 것이 사라져버려 텅 비고 허기진 마음에 문득 기도실에서 머물렀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제야 나의 욕망 뒤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이 보였다. 그분은 그저 OX푯말을 들고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었다. 주님은 말씀과 내 삶의 환경을 통해 매 순간 변론하시거나, 설명하시고 때로는 설득하셨다. 어느 때는 침묵하시며 잠잠히 듣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언제나 내 이야기와 사연 속에 친히 들어오셨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낮고 낮은 이야기 속에 함께하셨다. 그런 주님 앞에서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창피해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유치한 욕망들을 이루어달라고 하면서, 그것이 생의 기쁨이며 전부인줄 알았던 내 작음이 보였다.
그런 바램을 한가득 들고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을 때, 주님은 그런 날 한심하게 여기셨을까? ‘너 이거밖에 안되니? 넌 성장이 없니?’ 이렇게 나무라실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위해,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이름을 위해, 나를 왕이신 주님의 자녀답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자녀로 세우시려고, 내 연약함도 오히려 소중한 약재료로 사용하시고 다루셨던 주님의 치트키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바램을 잔뜩 들고 가서 하나님을 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내 전부를 받으신 것이다. 결국 내가 바라는 것들의 끝에서 만난 것은 짝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는걸까. 그분의 소망은 그저 ‘나’였고 ‘우리’였다. 본래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된, 거룩한 자녀로 회복된 ‘우리’. 또한 그런 우리 이야기의 전부가 되고 싶으신 것! 이 소망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다행스럽게도 멋진 하나님은 당신의 바램을 우리에게 강요해서 획득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그렇기에 오늘의 일상, ‘현재’를 내 바램의 결정체로 바라보며 감사의 고백을 올려 드린다.
이 믿음을 주시는 통로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 있다. 말씀과 기도라는 은밀한 시공간. 여기서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견적이 나온다.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현존하시는 사랑을 힘입어, 이제 조금씩 타자의 안녕을 위해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용기를 내어서, 더욱 낮은 곳으로 사랑의 타깃을 확장해간다. 그러려면 동시에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내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여전히 본능적으로 내 만족과 유익을 구할 때는, 자괴감에 소란스러워서 갈피를 못잡는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조금 더 거룩하길 소망하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바램들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발상과 강박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그 분의 열심으로, 오늘도 질그릇인 내 안에 소망의 콘텐츠를 질적으로 새롭게 하시니까. 내가 바라는 것이 더 이상 누추하거나 비루하지 않다.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맛본 자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오늘도 벗은 발로 주님의 거룩한 대지 위에 선다.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
‘거룩히 살아갈 힘과, 두렴 없는 믿음 주실, 완전한 사랑, 나의 하나님 찬양해’(나의 하나님 찬양 중). 아무튼 그 교회오빠 때문에 내 인생이, 주님만이 내 전부이신 삶으로 거듭나버렸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