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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학자P Aug 14. 2019

1945년 8월 15일, 그녀는 오빠를 잃었다

 매해 광복절은 내게 복잡 미묘한 기억이 있다.

언제나 담담한 표정으로 새벽부터 태극기를 준비하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외가댁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는 유독 국경일을 잘 챙기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의 국경일에는 살아있는 삶의 기억이 뒤섞여 있음을 나중에 고등학생쯤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1945년 8월 15일, 오빠를 잃었다.


 일본군에게 고문을 당한 것으로 기억한다 했다. 당시 외할머니도 어린 나이였기에 식구들이 자세히 말해주지도 않았을 테고, 구석구석 알 수는 없었다. 끌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뒤 오빠는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도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해방 소식이 울려 퍼진 그 15일, 오빠를 집에 두고 가족들 모두 거리로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때 느낌이 어땠어?" 그렇게 내가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저 신났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이런 답을 했었다. 일본어만 써야 했던 시기에, 갑자기 한국어로 만세를 수백 번 외치니 느낌이 이상했다고 했다. 만세, 라는 단어가 그렇게 낯설고도 소중한 느낌인 줄 몰랐었다고.


 이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빠는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매년 아들의 무덤가에서 통곡을 하며 살아가셨다 했다.


 오빠의 기일이며, 동시에 빛을 되찾은 그 날마다 빼놓지 않고 태극기를 걸던 할머니의 심정을 나는 아직도 헤아리지 못한다. 이제는 외할머니도 이 곳에 없다. 역사의 한 장면은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 조금 더 늦게 돌아가셨더라면, '내가 다 받아 적어 놓았을 텐데,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당신의 기억을 남겨두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끝이 없다.


 외할머니의 오빠는 젊은 나이에 후손도 없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았다.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증거가 없으니 지금의 나는 증명할 길도, 알 길도 없다. 그렇게 사라져 간 인물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 그곳에 차마 다 피지 못한 그의 삶이 있었다는 기억뿐이다.



 남겨진 이가 시작할 수 있는 건, 역시나 ‘기억’부터다. 기억되어야, 행동도 할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살아갈 날 동안

그 날 사람들이 느꼈던 소중한 '만세' 소리와,

그 날 눈을 감은 젊은 청년을 떠올릴 것이다.


그 기쁘고도 슬픈 광복절마다 태극기를 달던 외할머니를 기억하며

이제 매년 그 태극기를 내가 걸 것이다.


 이번 겨울에 태어날 내 아이도 그렇게 기억과 행동을 이어갈 것이다.



 요즘 불매운동이니 뭐니 말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하든, 애국을 하든 매국을 하든, 결국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어떤 일이 성숙한 판단인지는 각자에게 맡겨야겠지만, 당신에게만 예외의 결과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답은 어려운 곳에 있지 않다. 지나간 역사가 지나간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참고하길.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를 역겨워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기억하고자 하는지..





 2019. 8. 14. 광복절 하루 전 씀.

ps. 그 어두운 시기를 살아나간 수많은 영혼들이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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