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속 애도 읽기 (4)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통해 본 민중예술의 흐름
예술의 애도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당연히 전시와 작품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애도의 방식은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달라질 수 있고, 작가의 생각과 태도에 따라 과정과 결과물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보다는 예술의 애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옳은 편일 것이다. 예술의 애도에는 윤리적 고민과 책임이 뒤따른다.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예술의 애도는 오히려 타자와의 거리를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가의 개인적 감상으로 무게중심이 무너질 경우, 사회적 죽음의 의미는 변색되기 때문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할 때 의미를 가진다. 사회적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 낯선 타자를 다루는 일인데, 개인의 감흥으로 낯선 타자를 소재 삼는 일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낯선 타자이기에, 그에게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를 존중해야 한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신념과 생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시대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오늘날 무수한 기념비들이 구시대적 유물로 취급받는 현실에서 보다 미래적인 것을 향해 대중과 소통하고 나아가는 일은 기억을 만들어감에 있어 중대한 고려사항이다. 모든 것이 시끌벅적하게 지나가고 난 후,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적 죽음이 애도되어야 할 이유를 예술이 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미래적인 교감은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한국 예술도 그러한 기능을 성실히 수행했을까?
한국의 현대사는 죽음의 문제와 늘 함께였지만, 한국의 현대 예술은 시대적 문제와 충분히 호흡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 전쟁을 거쳤고, 이후에도 독재의 문제와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숨 가쁘게 달려야 했다. 현실에 닥쳐오는 위협과 위험을 해결하기도 벅찼던 것이다. 한국 현대 미술이 죽음의 문제와 사회의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에 들어서다. 민중을 이끌고 함께 투쟁하는 예술의 힘을 확인하기 시작한 시기다.
한국 현대사의 사회적 죽음에 대한 예술의 기억이 시대와 호흡한 사례로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들 수 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최병수 작가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판화는 1987년 6월 항쟁 때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를 표현했다. 이 대형 걸개그림은 민중미술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은 물론, 이후에도 끊임없이 복제되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이한열 열사 30주기 특별 기획전을 기념해 연세대 이한열 동산에 동상으로 제작되었다. 쇠로 만든 동상은 높이 3m, 폭은 1.2m 크기다. 이는 최병수 작가가 30년 전 만든 <한열이를 살려내라> 대형 걸개그림을 본떠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2017년에 설치된 이한열 동상은 당시에 품고 있던 시대적 분노보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기본적으로 걸개그림을 본떴으나, 피를 흘리는 부분을 빼고 몸 사이사이에 작은 별 모양들을 넣었다. 예술이 사회적 죽음의 기억을 시대와 호흡하며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의 태도에서 예술의 애도 태도를 생각해 본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무력성과 상처 받을 수 있는 그의 취약성을 이유로,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타자를 섬겨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타자를 환대하고 보살필 때 힘없는 타자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끝내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라진다. 거대담론 아래 소외된 개인을 기억하고 꺼내 줄 수 있는 역할은 누가 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열려있는 예술의 시각이 가장 잘 포착해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 작업은 타인에 대한 애정과 섬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다행스럽게도 타인을 받아들이고, 맞아들이는 관심과 책임감을 예술의 역사는 오랜 시간 증명해왔다. 그리하여 미래를 향한 예술적 애도의 열린 가능성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