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학자P Jan 20. 2019

예술의 연대와 애도, 용산참사 망루전

용산참사 10주기 - 용산참사와 망루전

 어느덧 용산 참사 10주기다. 용산참사를 모르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그 기억이 아득해진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린 학생이었기에 당시에는 오히려 제대로 알지 못했던 듯하다. 10주기를 맞아 당시 예술로서 연대했던 망루전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연대라는 행동은 사회적 문제를 고발할 때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이다. 즉, 사회 문제에 나서는 적극적인 행동의 방식이다. 특히나 연대의 모습이 예술에서 일어날 때, 기억의 작업을 연대로 진행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앞서 사회적 죽음을 다루는 일에 있어 중요한 지점으로 설명한 개인과 사회라는 이중의 문제와 함께 기억의 과제 모두를 아우르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전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펼쳐(展) 보임(示)으로써 대중과 소통한다. 사회적 죽음은 물론, 사회의 각종 문제를 주제로 한 예술의 연대는 주로 전시로 이루어진다.


 2009년 <망루전>과 같은 전시를 사례로 들 수 있다. 망루전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전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나서 용산 참사의 진실과 사회적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한 예술 행동이었다. 용산참사와 함께하는 예술가 30여 명은 현장 예술과 시각 예술 작품 및 문학 작품을 전시했다. 전시 기간 동안 용산참사를 위한 기금 마련을 했고, 예술 치유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이후 서울과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순회 전시된 바 있다.


 이 시점에서 일어났던 행동은 ‘공식 기억 작업의 지지부진한 상황과 달리 용산참사 사건은 일반 시민, 문화예술가, 독립 미디어 활동가, 종교인 등이 함께 연대해 국가 권력 중심의 공식 내러티브에 대항해 경쟁 서사를 마련하고 대항 기억을 스스로 재구성하면서 시민 기록의 의미를 되살렸던 중요한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 참고 : 이경래; 이광석, 「동시대 ‘대항기억’의 기록화 : 용산참사 사례를 중심으로」, 『기록학 연구』 53호, 한국기록학회, 2017.


 전시관 옥상에는 죽은 이들이 투쟁하던 공간인 망루를 재현했다. 재현된 망루는 관람객이 죽은 이들이 쓰러져간 같은 공간 안에 발을 놓게 함으로써 투쟁의 기억 속으로, 그 시간 속으로 이끈다. 여기에 서 있던 이들이 죽었다는 사실의 환기는 희생자들이 노출된 취약성이 곧 우리의 취약성이었음을 몸소 느끼게 한다. 



2009년 1월 용산구 한강로 2가 철거현장 화재 [ 출처: (CC BY SA)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wikimedia commons]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불확실한 삶>에서 폭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폭력은 최악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접촉, 다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일차적인 취약성이 가장 끔찍하게 노출되는 방식,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 속수무책인 채로 양도되는 방식,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의지적 행위에 의해 말살될 수 있는 방식임이 분명하다.”     



 게릴라 전시는 유가족의 슬픔에 연대함과 더불어 용산 참사와 국가폭력을 세상에 고발하기 위한 하나의 투쟁이었다. 남아있는 자들이 상실한 무엇인가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애도라면, 연대를 통한 투쟁은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예술의 애도일 것이다. 이러한 대항기억의 유지는 공식 기억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대화적 관계에 놓일 때 진정한 의미를 살릴 수 있다.     


 예술의 투쟁은 ‘대항기억’이다. 잊히고 묻히길 바라는 자와 꺼내고 드러내어 기억하려는 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예술적 투쟁은 빛을 발한다. 적극적인 예술의 투쟁은 사회적 문제와 맞닿은 애도의 모습 중 하나다.


 미국 작가 레베카 솔닛은 재난 연구를 진행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인간의 여러 가지 본성에 주목했다. 정신의학에서는 재난의 영향을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로 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연약한 인간으로서 행동의 영향을 받는 자아, 피해자가 되기 딱 좋은 인간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재난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회복력과 임기응변 능력, 관대함, 동정심, 용기’와 같은 것들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누군가를 잃고 나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꼭 ‘트라우마’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애도의 몸짓에 슬픔의 감정만이 지배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상실로부터,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상실로부터 슬픔을 넘은 관대함과 용기를 끌어낼 수 있다. 


 사회적 애도 작업은 그 애도의 최종적 목표가 망각에의 저항이면서, 사회적 용기 내지 어떤 책임감을 환기시킬 때 의의가 있다. 


개인적 감상에 그칠 경우,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과 구조는 여전히 덫처럼 존재한다. 만약 개인적 감상에 머무른다면, 굳이 연대의 작업을 하는 마땅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어떤 공공적, 집단적 성격을 가지고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레베카 솔닛이 이야기한 것처럼 슬픔을 넘어선 용기와 관대함을 이끌기 위한 힘 있는 발판이 된다. 남아있는 자, 살아있는 자로서 해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작업이 될 때, 그것을 애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다음 걸음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회복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모르는 제노사이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