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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Agent Jan 22. 2021

Play Ball! 팀 '좋은 스포츠'의 창단(1)

우리 회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Play Ball! 팀 '좋은 스포츠'의 창단(1)

:  우리 회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앞의 글들을 통해 이야기했지만, 나에게 창업이란 그리고 스포츠 에이전시를 운영한다는 건, 큰 모험이자 그 자체로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일종의 미션과도 같았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회사의 운영 방안에 대한 실질적인 이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회사 로고 만들기, 홈페이지 제작, 직원 고용, 사무실 구하기, 선수 영입 등등..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이슈와 현안에 매몰되는 순간 조직의 운영에 대한 큰 그림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는 결국 큰 관점에서는, '제품 수명주기' 이론을 만들어 낸 하버드대의 Levitt(1960) 교수가 주장한 'marketing myopia(마케팅 근시안)'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안에 등 떠 밀리기 전, 내가 만들 회사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는 조직과 전략 경영에서는 Visioning이라고 하는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회사의 지향점이 분명히 서있고, 이는 조직원들과 분명하게 공유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따라서는 이를 shared meaning 내지는 shared value와 같은 용어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공유된 가치가 클수록 그 조직은 더 건강하고 더 지속 가능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공유된 가치가 클수록 그 조직은 더 건강하고 더 지속 가능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좋은 스포츠'의 공유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좋은 스포츠에는 이 비전이 존재하긴 했을까? 수년이 지난 지금 회상해보건대, 좋은 스포츠에는 분명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가치가 조직 구성원들 전부와 공유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렇게 조직이 존재하는 가치를 구성원과 공유하지 못하는 순간, 혹은 구성원들의 동감을 얻지 못하는 순간, 조직원들에게 조직은 단순히 돈을 버는 대상이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대의와 개인가치의 충돌에서부터 조직은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보다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현안들을 소위 '쳐나가기' 전에, 조직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스포츠 에이전시를 창업해야겠다고 생각한 당위성에 대한 설명은 앞서 그럴듯하게 설명하였지만 그 고민의 시작은 매우 단순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내 전문분야에서 무언가 좋은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 전부였다.  


사회가 승자 독식의 논리에 미쳐 돌아가더라도, 땀의 가치.. 시상대에 오르는 것보다 오르는 과정이 무엇보다 귀중한 스포츠의 정수를 살리는 일. 그리고 땀, 눈물, 감동이 녹아있는 스포츠 정신, 특히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어렵고 힘든 선수를 도와주는 일에 헌신하고 싶었다.


시상대에 오르는 것보다 오르는 과정이 무엇보다 귀중한 스포츠의 정수를 살리는 일.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나에겐 좋은 친구이자 작은 형과 같았던, 좋은 스포츠의 감사이자 고문 역할을 했던 김 모 변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포츠 에이전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겐 그에 필요한 지식과 전문성이 있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에, 창업의 형태와 업종을 정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손으로 스포츠를 보다 더 '좋게' 만들는데 이바지하고 싶었다. 스포츠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 아름다워지는 꿈을 항상 꿔왔듯이 말이다.


그래서 회사의 존재 이유를 글로 적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장수가 전쟁터로 나가기 전 출정식에 비장한 각오로 임하듯, 한 줄 한 줄 비장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내 생각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글은 이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할까 한다. 이 글은 수줍은 자기 고백이자, 회사의 존재 이유였다.




스포츠는 우리에게 늘 ‘좋은’ 존재였는가?

좋은 스포츠란 무엇인가? 스포츠가 좋다는 것은 스포츠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핵심 요소들의 ‘좋음’을 의미한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스포츠의 핵심 자원인 ‘선수’이다.


첫째, 선수는 운동 기계가 아니다.

선수는 스포츠 서비스를 제공하는 핵심 서비스 공급자이자, 비정형적 스포츠 서비스의 몇 안 되는 물리적 실체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수들을 운동기계로 간주하고, 선수 스스로도 좋은 성적을 선수가 지향해야 할 궁극점으로 간주하는 순간, 오직 승부만이 성적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된다.


이와 같은 단일 목표가 그들에게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것은, 그들이 좋은 선수를 넘어 ‘좋은 사람’으로 발전하고 기억될 수 있는 기회를 때때로 박탈시킨다. 단일 목표가 필연적으로 야기한 성패에 대한 중압감과 고통은 그들의 누구인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지. 선수 이후의 삶은 어떠할지를 고민하는 것을 사치로 만들기도 한다.


선수는 ‘좋은 선수’를 넘어 ‘좋은 사람’으로 발전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선수에서 좋은 사람으로의 발전 과정에 요구되는 선수의 노력 위에, 좋은 교육, 좋은 기회, 좋은 환경이 인터벤션 과정의 through-put으로 요구됨은 자명하다.


우리 ‘좋은 스포츠’는 좋은 선수를 좋은 사람으로 발전키 시기 위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가 선수와의 계약 특약 1번에 다음의 항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용기 있게 써넣는 이유이다.


“선수의 계약 해지 요청이 있을 시 언제든 즉각 계약을 해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금전적 손해 배상을 요청하지 않으며, 법적 분쟁 해결 과정이나 소송을 진행하지 않는다. 이는 선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좋은 스포츠의 운영 철학에 기반한다.”


“선수의 계약 해지 요청이 있을 시 언제든 즉각 계약을 해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금전적 손해 배상을 요청하지 않으며, 법적 분쟁 해결 과정이나 소송을 진행하지 않는다. 이는 선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좋은 스포츠의 운영 철학에 기반한다.”




둘째, 우리는 스포츠 자체가 발전하길 소망한다.

최근 프로스포츠에서는 오심에 대한 판정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선수에 대한 보복은 물론, 심판에 대한 보복 행위도 등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배제되었고, 스포츠에서만 볼 수 있는 상호 존중의 고귀한 과정 역시 생략되었다.


프로야구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의 연봉은 무려 25억이다.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우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다. 선수의 그와 같은 억대 연봉은 결국 시장에서 생성된 가치이며, 시장의 구성 요소에 대한 규명은 결국 다시 ‘우리’로 회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스포츠의 인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스포츠의 지향점은 다시 ‘우리’가 되어야 한다.


승리에 대한 욕망이 전체가 되어 버린 스포츠. 승부 조작, 보복, 각종 보기 민망한 모습들로 얼룩지는 스포츠. 이는 과연 우리 사회의 위로 기제로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해왔던 스포츠의 정수에 부합되는가? 가슴 아픈 참사와 이런저런 속상한 일들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기대어 쉴만한 언덕이었을까? 과연 스포츠는 ‘좋은’ 스포츠였을까?


우리 좋은 스포츠는 스포츠가 승부의 가치를 넘어, ‘좋은’ 스포츠로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고 기억되길 소망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가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한다.




셋째, 우리 사회는 ‘좋은 선수’와 ‘좋은 스포츠’를 통해 ‘좋은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스포츠를 통해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아왔다. 때로는 땀과 눈물로, 때로는 승리의 감동으로, 때로는 유쾌한 기억으로 스포츠는 이미 우리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가슴 시린 참사를 너무도 자주 겪고 있다. 1990년 세모 유람선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2009년 용산 화재사고,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고, 2017년 제천 화재사고 등,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아픈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자주, 그리고 계속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포츠는 우리 사회의 위로가 되어온 것이 아닌지 조심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갈수록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는 참여 스포츠 인구는 크게 늘고 있으며, 프로스포츠의 관중 수 역시 각종 참사 이후에 매번 큰 폭으로 증가하여 왔다. 또한, 지속적인 경제 침체나 경제성장률 하락 속에서도 스포츠의 직간접 소비는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즉, 우리 사회가 아프고 힘들 때마다, 우리에게 위로를 넌지시 건네줬던 매개체. 그것이 바로 스포츠가 아니었을까?


문화화가 된다는 것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스포츠의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이 강조될수록, 스포츠의 필연적이고 본연적인 정체성은 ‘위로’와 ‘기쁨’을 모두 포함한 ‘함께’로 수렴되어야 한다. 따라서 스포츠를 사회에게 제공하는 선수들의 활동과 스포츠 자체는 승리의 무한 추구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포츠에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보길 소망한다. 선수가 보여주는 스포츠의 최선을 통해, 사회가 보듬어지고 위로받는 광경을 목도하길 희망한다. 스포츠를 통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치의 실현을 위해 우리 ‘좋은 스포츠’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좋은 스포츠, 더 나아가 FAITHFUL SPORTS(신실한 스포츠)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좋은 스포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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