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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May 10. 2020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로맹 가리 <가면의 생> - 자신의 익명(부재)에 대한 항소 이유서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세상의 정의로 가짜(pseudo)는 곧 부재(不在)이다.


가면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쓴 세 번째 책이며 그의 익명에 대해 세상이 내리는 단죄에 대한 일종'항소이유서'이다. 즉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려는, 무엇으로도 일컬어지지 않으려는 '아자르 방어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미치광이의 가면을 빌려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자유롭게 날린다. 정치적이지 않으니 자유롭다. 그 자유를 이용하여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들러붙어있던 우울과 불안을 토해내 대면하기도 하고 교묘히 세상을 조롱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예 '비단뱀'이 되어 타인들, 특히 유태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여러 차례에 걸쳐 스스로를 '비단뱀'이라고 상상함.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성격을 부정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의식과 의무감과 책임을 회피하려 함. 이러한 비단뱀의 상태에서 소설 「그로칼랭」을 이끌어 냄. 자신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오랜 자위행위의 소산임.

정확한 지적이다. (중략) 어쩌면 나는 유태인이라는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단뱀이 된 것은 아닐까? (p.16)


로맹 가리에게 있어서 도대체 '죄의식'은 무엇인가? 그에게 매번 나타나는 경찰들은 무엇을 잡아내려 하는가?

나는 추적당하는 일을 막기 위한 신중함을 발휘해 내 첫 번째 책의 계약서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서명했다.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경찰들은 부재의 징후만 포착되면 달려들어 사람을 끝장내기 때문이다(p.43)

내가 왜 정체성으로부터 도망치려 그렇게 애쓰는지,.. 왜 그렇게 유전을 거부하고 죄의식을 느끼는지를 이제 깨달았습니다.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예수라는 짐을 지운 것에 대해, 그 모든 요구와 도덕과 체념과 자기희생과 박애와 구속을 부과한 것에 대해 우리에게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p.96)


로맹 가리는 자신이기도 한 통통 마쿠트를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고통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 그런 근친상간의 고통을,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말한 대로 단지 예술적인 목적을 위해 어떠한 비극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했어. 그건 근친상간, 근친교배, 타락, 광기의 행위이지만 단지 예술적인 목적에서 그런 것뿐이네. 그리스 비극은 고통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어... 다양하고 풍성한 고통 없이는, 죽음 없이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주제 없이는 문학도, 영감의 원천도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찾겠니? 천지창조는 오직 예술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졌네. 그 성공은 수많은 걸작들로 증명되고 있어" (p.213)


아버지 없는 가난과 유럽 도처를 돌아다니며 겪은 인종차별의 혹독함 속에서도 어머니 니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동원해 아들을 세상에 우뚝 서도록 키워냈다. 로맹 가리는 그러한 어머니의 희생, 혹은 과도한 욕망을 등불 삼아 열정적으로(그러나 자기 것이 아닌) 생을 불태운다.


그러나 폴란드인도 러시아인도 리투아니아인도 유태인도 그리고 프랑스인도 아니었던 그가 '정체성'이라는 화두 속에 갇힌 것은 숙명이다. 그는 '정체성'의 고치 속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나비를 꿈꾸며 탈피를 반복하고 매번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태생적으로 예민하고 여린 로맹 가리는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혼란에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 우울증이 가져오는 '불안'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는 이러한 고통을 치료받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한다. 아니, 그는 그 만의 독특한 주제를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제물로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어머니를 소재로 쓴 '자기 앞의 생'처럼.

그러나 그는 애매하다.

그가 지닌 죄의식은 '인간의 고통'을 제물로 하여 걸작을 쓰고자 하는 '욕망의 자위행위', 그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고통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걸작들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p. 177)

라스콜리니코프를 좀 보시오. 그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이유에서 도끼로 그 노파를 죽이지 않았소(p.185)


로맹 가리는 '명예'를 중요시했다. 그는 어머니의 자랑이자 명예였다. 그 명예를 위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외교관이 되었고 걸작을 쓰고자 했다. 자신의 글을 누군가 대신 써주고 있을 것이라는 세간의 소리에 경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신의 책을 사실은 누군가 대신 써주었다, 누군가 당신이 그 책을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들 해요."... 저자로서 자존심이 어찌나 상처를 입었던지 내 명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자의식 없이 새끼 고양이 백 마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p.134)

"익명으로 남고 싶어요! 정말이지 익명으로 남고 싶다고요! 하지만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내 책을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었다고 떠들어댈 겁니다! 그건 참을 수가 없다고요!" (p. 137)


그리하여 자신의 외사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로 내세운다. 그리고는 그에게 '에밀 아자르'가 '가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약조까지 종용했다고 한다. 이 폴 파블로비치야말로 로맹 가리에 의해 '가면의 생'을 살게 된 것이다. 로맹 가리는 학대받는 자에서 학대하는 자가 되었고, 파블로비치는 괴로워하면서도 그 학대를 즐긴 듯하다.

타자수이자 독자이자 당사자인 파블로비치는 이제 가리의 손안에 든 재료에 불과했다. (중략)
가리는 폴의 뼛속까지, 폴이 애써 감추거나 무시하려 한 것까지, 억압된 욕망이나 공포까지 파고들었다. 파블로비치는 이렇게 쓴다. '그것은 즐거운 관장이었다.' - 도미니크 보나 <로맹 가리> p.392


또다시 죄의식.  살 때 같이 놀던 새끼 고양이를 죽였다는 것은 사실인가, 죄의식의 형상화인가? 죄의식의 불안, 공포는 학살자 피노체트로 확장된다.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그 두 얼굴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은 로맹 가리 자신, 그리고 우리를 향한다.

나는 나의 공포에다 피노체트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준다. ( p.116)

고문을 받아 죽어가면서 하나의 학살에서 또 하나의 학살로 옮겨 가는 존재가 핏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 겁주는 자와 겁먹는 자, 짓밟는 자와 짓밟히는 자가 공존한다. 정신분열증 환자인 나는 둘로 분리된다. 말살하는 자이면서 말살당하는 자, 박해받는 플리우슈치면서 박해하는 피노체트가 되는 것이다. (p.158)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돌을 던진 행위를 인식조차 못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을 쓰고 돌을 던진 자를 욕한다. 그리고 온갖 우스꽝스러운 '위장'과 '가면'을 하고 카니발(謝肉祭, 사순절의 금욕, 사육에 앞서 즐기는 행사)에서 행진하고 있다. 금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fotomen90, 출처 Unsplash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세상에서 로맹은 자신의 역할, 문학으로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살아가야 한다는 소명(calling)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그랑 호텔의 내 방으로 올라와 신을 불렀다... "당신입니까, 아닙니까? 그걸 알아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중략)
"너 자신과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봐. 서사, 파블로비치, 서사적 작품을 쓰는 거야. '자아'는 지나치게 내면적이고 제한적이고 이내 고갈되고 말지. 작가에게 인간이란 주제의 광산, 명실상부한 금광이야. 네 주위를 들러봐. 칠레, 수용소, 학살, 가혹한 박해 같은 걸 여전히 찾아볼 수 있잖아. 넌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 아자르. 그들이 무용하게 죽어간 것이 아니야" (p.214)


그리하여 마침내 삼위일체(로맹 가리+폴+에밀)의 ''이 가면의 생을 계속 밀어붙이기로 한다.

나, 폴 파블로비치는 희화화된 이 세상에서 희화화된 삶을 사는, 희화화된 인물
에밀 아자르로서 사는 일을 받아들이는 바입니다.



<가면의 생 (pseudo)> 기저에 흐르고 있는 감정은 '불안'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도 '로맹 가리'가 들통날까 봐 늘 '경찰'의 출현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세상은 익명(부재)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체성이 없는 것은 가짜라고 여긴다.

에밀 아자르가 폴이 아닌 로맹이라는 것이 발칵된다면 그 망신살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그가 미치광이 가면을 쓰고 농락한 콩쿠르 상 심사위원들, 갈리 마르 출판사, 기자들, 그리고 독자들까지 그를 사기죄로 고소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중에서도 독자들.... 어쩌면 그의 모든 글을 외면하고 부정할 것이다. 다 가짜라고.

그렇다면 로맹 가리는 권총 자살로 그의 부재를 실현함으로써 그의 모든 것인 작품을 살려낸 것은 아녔을까?

저기,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고 죽은 것처럼, 그는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영영 죽을 뻔한 그의 작품들을 부활시킨 것이다.


빌어먹을, 문학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나는 내 얼굴이 두꺼워지지 않도록 의식하며 살아간다.
아니, 때로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으며 내 안의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매일의 가면을 쓴다.
사순절의 제사를 혹은 카니발에서의 현란한 춤을 위해 문학의 힘을 빌린다.

그리하여 여기, 그 힘을 확장시킨 문학의 제사장, 고독한 메시아로서 스스로 십자가를 진 로맹 가리를 기리는 순례의 길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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