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가면의 생> - 자신의 익명(부재)에 대한 항소 이유서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스스로를 '비단뱀'이라고 상상함.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성격을 부정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죄의식과 의무감과 책임을 회피하려 함. 이러한 비단뱀의 상태에서 소설 「그로칼랭」을 이끌어 냄. 자신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오랜 자위행위의 소산임.
정확한 지적이다. (중략) 어쩌면 나는 유태인이라는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단뱀이 된 것은 아닐까? (p.16)
나는 추적당하는 일을 막기 위한 신중함을 발휘해 내 첫 번째 책의 계약서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서명했다.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경찰들은 부재의 징후만 포착되면 달려들어 사람을 끝장내기 때문이다(p.43)
내가 왜 정체성으로부터 도망치려 그렇게 애쓰는지,.. 왜 그렇게 유전을 거부하고 죄의식을 느끼는지를 이제 깨달았습니다.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예수라는 짐을 지운 것에 대해, 그 모든 요구와 도덕과 체념과 자기희생과 박애와 구속을 부과한 것에 대해 우리에게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p.96)
"나는 내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했어. 그건 근친상간, 근친교배, 타락, 광기의 행위이지만 단지 예술적인 목적에서 그런 것뿐이네. 그리스 비극은 고통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어... 다양하고 풍성한 고통 없이는, 죽음 없이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주제 없이는 문학도, 영감의 원천도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찾겠니? 천지창조는 오직 예술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졌네. 그 성공은 수많은 걸작들로 증명되고 있어" (p.213)
내가 고통을 예술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걸작들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p. 177)
라스콜리니코프를 좀 보시오. 그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이유에서 도끼로 그 노파를 죽이지 않았소(p.185)
"당신의 책을 사실은 누군가 대신 써주었다, 누군가 당신이 그 책을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들 해요."... 저자로서 자존심이 어찌나 상처를 입었던지 내 명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자의식 없이 새끼 고양이 백 마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p.134)
"익명으로 남고 싶어요! 정말이지 익명으로 남고 싶다고요! 하지만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내 책을 다른 사람이 대신 써주었다고 떠들어댈 겁니다! 그건 참을 수가 없다고요!" (p. 137)
타자수이자 독자이자 당사자인 파블로비치는 이제 가리의 손안에 든 재료에 불과했다. (중략)
가리는 폴의 뼛속까지, 폴이 애써 감추거나 무시하려 한 것까지, 억압된 욕망이나 공포까지 파고들었다. 파블로비치는 이렇게 쓴다. '그것은 즐거운 관장이었다.' - 도미니크 보나 <로맹 가리> p.392
나는 나의 공포에다 피노체트의 얼굴, 학살자의 머리를 달아준다. ( p.116)
고문을 받아 죽어가면서 하나의 학살에서 또 하나의 학살로 옮겨 가는 존재가 핏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 겁주는 자와 겁먹는 자, 짓밟는 자와 짓밟히는 자가 공존한다. 정신분열증 환자인 나는 둘로 분리된다. 말살하는 자이면서 말살당하는 자, 박해받는 플리우슈치면서 박해하는 피노체트가 되는 것이다. (p.158)
나는 그랑 호텔의 내 방으로 올라와 신을 불렀다... "당신입니까, 아닙니까? 그걸 알아내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중략)
"너 자신과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봐. 서사, 파블로비치, 서사적 작품을 쓰는 거야. '자아'는 지나치게 내면적이고 제한적이고 이내 고갈되고 말지. 작가에게 인간이란 주제의 광산, 명실상부한 금광이야. 네 주위를 들러봐. 칠레, 수용소, 학살, 가혹한 박해 같은 걸 여전히 찾아볼 수 있잖아. 넌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 아자르. 그들이 무용하게 죽어간 것이 아니야" (p.214)
나, 폴 파블로비치는 희화화된 이 세상에서 희화화된 삶을 사는, 희화화된 인물
에밀 아자르로서 사는 일을 받아들이는 바입니다.
빌어먹을, 문학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