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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May 30. 2020

봄밤에 물들고 싶다

이 계절이 가기전에 <충만함>

화사했던 낮의 분주함을 어둠이 가라앉힌다.

어쩌지 못하는 에너지, 잠시 잠재우고 이제는 생각에 잠길 시간. 분주함에서 나는 무엇을 얻은 만큼 놓쳤을까...


이른 저녁을 가볍게 먹고 사랑하는 이 손 잡고 봄밤을 거닌다. 아직 남아있는 낮의 향기가 반갑다.

따뜻한 나무 냄새옅은 어둠이 주는 평안함이 좋다.


아무 말 없이 걷다가 가로등 아래, 불빛보다 눈부신 꽃잎들을 보며 낮은 탄성을 지른다. 우리의 사랑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오직 그 빛나던 눈동자와 달콤한 소리가 모든 것이었던.

동네를 넓게 돌며 불 켜진 집들을 먼발치서 기웃거리다 드라마 ‘연애시대’를 찍었던 요한성당 길목에 접어들었다.
25살 손예진의 봄 햇살 같은 귀여움과 봄 밤 같은 따뜻한 미소, 감우성의 그늘진, 부드러운 눈웃음이 설레던 드라마. 사랑하여 결혼하였으나 2년 만에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며 또 다른 너를, 나를 만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사랑은 마디마디의 단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마디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봄꽃 같은 사랑.


봄밤, 동네 한 바퀴 넓게 더 거닌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멀리서 개 한 마리 컹컹 짖는다. 고요한 이른 봄밤의 소리에 밥 냄새가 묻었다. 

해 질 녘까지 다방구 하며 놀다가 엄마가 부르면 달려갔던 시간. 개들도 꼬리 물며 놀다 집으로 돌아갔던 시간들.

어둠은 낮의 생기를 덮으며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들,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것들검은 물감 연하게 풀어놓으며 덮어갔다. 낮의 서운함이 엄마의 따순 밥으로 잊히곤 했다.

봄밤은 엄마의 자궁 속 같다. 넓은 시계(視界)를 어둠으로 가두어 동굴로 만들고 따뜻한 호흡으로 나를 히는, 얕은 향기로 미소 짓게 하여 생명의 손짓 보내는 엄마의 자궁 같은 봄밤.


사랑하는 이의 따뜻한 손 잡고 동네 한 바퀴 크게 돌면 세상이 온통 따뜻한 엄마의 품 같아 그냥 그대로 머물러 버리고 싶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봄밤에 물들고 싶다.


봄밤에는  필요하다.

내 마음 이렇게 어두워도
그대 생각이 나는 것은
그대가 이 봄밤 어느 마당가에
한 그루 살구나무로 서서
살구꽃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하고 그대하고만 아는
작은 불빛을 자꾸 깜박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 안도현 <봄밤>



동네 한 바퀴 크게 돌며 찍은 봄밤 (2020.5.25)

교회 첨탑 위 초승달, 정말 손톱같다
달이 어디?(feat. my mr.right 아마도 ^^)
고요한 요한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피에타' 조각상이 있다)
단골 커피 가게. 이곳에서 로스팅된 원두를 산다. 하우스 블렌딩도 좋다.
담장의 장미꽃들이 커피가게의 작은 조명에게 무어라 소곤거리는
빨간 우체통이 놓인 작은 와인 바.안에 사람들이 있어 뒤로 후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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