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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un 04. 2020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 조지 오웰 <1984>의 경고

조지 오웰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글쓰기의 최전선"의 은유 작가 때문이다.

현장 르포 작가로서 삶을 살아내는 은유 작가의 글쓰기에 매료되어 그녀의 글들을 찾아 읽다 보니

그녀가 추구하는 글의 노선 속에 "조지 오웰"이 있었다.

은유 작가를 좋아함은 관념 속의 글들이 아닌, 현장 속에서 같이 아파한 사람만이  수 있는 언어들을 쓰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1903~1950)은 현장에 가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빈민가에서 생활하며 노동자 계층 중에서도 가장 빈곤한 이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면서 사회주의적 정치관을 정립하게 된다./ '파시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그는 이  전쟁을 통해 '민주적 사회주의'가 실현되리라고 낙관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다르게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로 일컫는 '전체주의'의 실상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것이 진실을 왜곡하고 인간의 본성을 위협하는 것을 보며 깊은 회의에 빠진다.  - <동물농장>(열린 책들) 저자 조지 오웰 소개 중



<1984>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 ,


텔레스크린을 향해 돌아서며 윈스턴 스미스는 짐짓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한 표정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 숨소리마저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은 쇳소리를 내며 모든 사람들에게 증오를 세뇌한다.

공동의 적 골드스타인을 향한 사람들의 증오가 극에 달할수록 당 지도자인 '빅 브라더'를 향한 숭배의 외침은 광적이다. 반역의 호흡만 느껴져도 '사상경찰'이 달라붙고 불순분자들은 '증발'하여 '무(無)'가 된다.


숨 막히는 감시 속에서 윈스턴은 몰래 '일기'를 쓴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

감시는 촘촘하고 일기를 쓰는 '사상죄'는 언젠가는 발각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일기를 쓰던 안 쓰던 결과는 마찬가지다. 사상죄는 죽음을 수반하는 게 아니다. 사상죄는 죽음 그 자체다.


윈스턴은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싶었으며 자기와 같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것 '같은' 사람과 접촉하고 싶어 한다. 그러던 와중 그는 주변의 두 사람을 염두에 둔다. '믿고 싶은 자'와 '혐오를 가져다주는 자'.

전자는 베일에 가린 내부 당원 '오브라이언'이고 후자는 분홍색 옷을 입은, 당에 충성하는 젊은 여자(줄리아)다.

오브라이언의 정치적인 신조가 불완전하리라는 은밀한 믿음, 아니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윈스턴은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싫었다... 고집스럽게 당에 충성하는 사람들, 슬로건을 곧이곧대로 신봉하는 사람들, 아마추어 스파이들, 이단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여자들, 그것도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짐작은 정확히 어긋나고 만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오세아니아 사회는 궁극적으로 빅 브라더는 전능하고 당은 완벽하다는 신념 위에 서 있다.

이러한 절대 권력의 당을 존속시키는 도구들은 전쟁, 예속, 무지다.


# 전쟁은 평화

기계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회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과잉생산의 문제는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 해결되고 전쟁은 또 대중의 사기를 필요한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데에도 유용하다.
전쟁은 단순한 국내 문제일 뿐. 영원한 평화는 영원한 전쟁과 같다.


전쟁은 내부 체제 유지를 위한 Showing에 불과한 것이다.


# 자유는 예속


- 성욕은 사상죄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사랑보다 더 큰 죄는 성욕이다. 성욕은 사상죄에 해당되었다. 섹스의 목적은 단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은 것이여만 하고 아이는 인공수정으로 낳고 공공기관에서 키우게 되어있다.

쾌락은 자유를 꿈꾸기 때문일까? 


- 신어

언어는 '영사(영국 사회주의)'와 '오세아니아'를 위한 신어로 대체되고 기존의 언어들은 축약되거나 사라진다. 결국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고 있음을 조지 오웰은 '사임'을 통해 직접적으로 말한다.

사임이 거무스름한 빵을 다시 한 입 물고 이어서 말했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당이 정하는 것만이 진리이다.


# 무지는 힘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라고 윈스턴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윈스턴의 희망은 절망적이다.


오세아니아 인구의 85%인 노동자들. (노동자들과 동물에게는 자유가 있다.) 그 절대적인 숫자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체제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힘든 육체노동, 가정과 아이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영화, 축구, 맥주 , 도박이다. 그러나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함성을 지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 배급량을 줄이는 데 대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호응하도록 당이 필요할 때마다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원시적인 애국심뿐이다. 그들은 불만이 있어도 일반적인 사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달리 해소할 방법을 못 찾는다.


무산계급에게서 정치적 의식은 자라지 않으니 그들에 의해 당의 체제가 무너질리는 없다.

따라서 들의 집에는 텔레스크린도 없으며 치안 경찰마저 간섭하지 않는다.


역사의 날조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즉,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당의 존재, 권력유지를 위해 과거를 변조한다. 기억통* 속에 과거의 기록을 태워버리고. 이중사고**를 이용해 과거를 버린 것조차 잊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통제는 무엇보다 기억의 훈련에 달려있다.

매일 매 순간 과거는 현재의 것이 되곤 한다.


*기억통 : 반드시 폐기해야 할 문서들이 가는 아궁이

**이중사고 :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


윈스턴은 같은 청사에서 근무하던 줄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쾌락마저 억압하는, 나아가 역사(진실)를 날조하는 당에 저항하고자 그는 내부 당원 오브라이언에 끌리어 체제 저항 단체인 '형제단'에 가입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 자체 속에 들어 있게 마련이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체제에 저항하려 했던 그는 함정에 빠진 것이었고 극악한 고문과 세뇌로 결국은 연인 줄리아를 배신하기까지에 이른다.

당은 그가 둘 더하기 둘은 넷이 아니라 다섯임을 진심으로 시인하고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그는 증발될 것이다.


한 개인이라도 당에 대해 저항한 상태로 죽는 것은 당에 대한 모욕이기에 그를 철저히 세뇌시킨 후 없애버린 것이다.




윈스턴 스미스 얼굴에 중국의 의사 리원량이 스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세상에 처음 알린 그는 '인터넷에 부정적 발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우한 공안국에 의해 소환되었다. 사실 확인을 하는 대신 한 전문가의 입을 강제로 봉하고 허위 진술서를 받아내었다. 전염병 소문이 나면 우한 지역의 경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의 봉합은 더 큰 화를 불렀다. 전 세계에 전염병이 휘몰아쳐 언제 끝날지도 모를 재앙이 되었다. (리원량은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되어 2월 6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중국은 IT 기술을 통해 개인을 감시하고 일방적인 언론으로 인민을 호도하며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묘사한 디스토피아는 IT기술의 발달로 일정 부분 현실이 된 것이다.

또한 개인의 생활 행적이 전염의 확대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현 코로나 19의 시국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마저 '빅 브라더'는 위험한 당위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4>를 읽으며 빅 브라더에 대한 우려보다는 계급 사회에 대한 암울한 진행형 더 큰 숨을 불렀다.

무산계급의 고단한 삶은 가상의 오세아니아에서 뿐만 아니라 내 발이 내딛고 있는 이곳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들은 개혁, 진보를 향한 시선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삶이 버겁다.

베블런이 보기에 하위 소득계층이 처한 현실은 '합리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할 여건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속된 말로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힘든 일상 속에서 하위 소득계층은 기존의 제도와 생활양식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아니 오히려 기존 제도와 생활양식에 다른 어느 계층보다 충실해야만 그나마 기초적인 생존이 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위 소득계층은 당연히 기존 제도와 생활양식에 가장 순종적이 될 수밖에 없고(되어야만 하고) 결국 그렇게 그들은 '보수적'이 된다는 게 베블런의 분석이다.

-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 (뉴스타파 김진혁. 2014.7.30) 중에서


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 경고를 하는 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신어' 개념을 통한 언어의 의미와 역할, '기억통'을 통한 역사의 변조(우리나라의 모 정부는 한 때 국정교과서를 그 기억통으로 쓰려했다)에 대한 통찰력은 뜨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중사고'를 빗댄 우리의 무감각, 무뎌짐에 대한 경고가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현재 우리는 기후변화의 징후를 겪고 있으면서도 망각하고 사는, 일종의 '이중사고'로 코로나보다 더 큰 재앙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두렵다.


조지 오웰이 <1984>를 출판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그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라고 했던 말이

또 다른 의미로 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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