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울뻔했다.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아들이 문제를 좀 내주라며 내민 공책을 받아 들자 졸려서 희멀거던 두 동공이 활짝 열렸다. 열리다 못해 준비되지 않은 뜨거운 물까지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아니, 정녕 이것이 내 아들의 노트란 말이지?"
올해 열다섯 살. 여덟 살을 기점으로 세상을 다 알아버린 듯 글씨들이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했었다. 자기가 써놓고도 못 읽고 지키라고 그어진 반듯한 선들은 없는 듯 무시하고 첫 장 다음은 중간인 듯 도무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녀석의 공책들. 아니, 그저 마지못해 선생님이 하라 하니 '끄적'거리던 공간들.
그런데 어제아들이 불쑥 내민 질서의 아름다움에 홀리고 말았다. 일반적인 서술은 검정으로, 예시문은 파랑으로, 절대 기억해야 할 것은 빨강으로 조화롭기까지 했다.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는 예의까지, 완벽했다. 세상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경이로웠다. 예상치 못한 '감동'으로 목소리까지 떨리며 울컥하는 모양새가 개그 같기도 해서 애써 참으며 점잖게 칭찬해 주었다.
"우리 찬이도 하면 하는구나, 잘했어!"
전에 없이 문제를 내주라며 공책을 내민 이유가 있었다. 아이는 벌어지려는 입을 어색하게 오므리고 쭈뼛쭈뼛 멋쩍어했다. 물론 내어주는 문제에 답도 척척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뭐 이런 것에 호들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범생의 어머니는 더욱 모를 것이며 속으로는 비웃을 지도 모른다. 가난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변곡점의 떨림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입이 간질간질했다. 마침 제 방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끼고 뒹굴고 있던 스물두 살 딸에게 이 감동적인 소식을 전했다. 딸은 "말 그대로 소확행이네." 하며 내 파동에 살짝 미소로 동의를 해주고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삶의 선들은 곡선이다. 찬란한 태양을 향해 오르다가도 볼록함의 최고봉 어느 한 점(변곡점)을 지나면 그늘로 가득한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반대로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터널의 오목함도 어느 한 점을 지나면 다시 태양을 향해 솟아오른다.
아들이 준 어제 낮의 떨림은 그러했지만, 오늘 나의 곡선은 막 변곡점을 지나 서서히 오목하게 그어지려 하는 초입에 있다. 글 쓰는 재미에 빠져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깊게 배우고 싶어 들어선 길에서 잠시 낙담하고있다.아련하게 동경하는 것과 그 속에 들어가 구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은 관객과 배우의 간극과도 같을 것이다.
얼마 전에 과제로 제출한 시는 분명 '시적'이지 못한 것이다.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직 체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마감일에 치여서 썼고 게시판에 올라온 다른 이들의 것들은 분명 내 것과는 달랐다. 기죽었다. 그러함에도 어젯밤실시간으로 행해진 첫 합평 시간에 그들의 것이 '시적이지 못하다'라고 교수가 선고했다. 나의 것은 다음 주에 평가되겠지만 예상되는 선고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처음', '출발'이라는 위로도 반백의 두께에는 잘 스미지 않는가 보다.
또다시 밤이 깊어 가고 있다. 내 시름도 깊어지려 하는데 변곡점의 간지러운 떨림을 맛보았던 아들의 방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온다. 평소 같으면 킥킥거리는 소리나 무엇을 하는지 모를 침묵이 있는 공간인데 어제의 진동이 기타를 끌어안게 했나 보다. 누나에게 건네받은 기타로 요즘 연습하는 단 하나의 곡이 있다. 거의 모든 기타 입문자들이 열광하는 일본 기타리스트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식탁에 앉아 눈을 감고 아들이 들려주는 해질녘의 소리를 듣는다.
오목한 곡선의 변곡점을 향해 떨어지며 태양이 흘리는 빛은, 그 소리는 쓸쓸하지만 슬프지 않고 고독하지만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