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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Jan 07. 2021

사춘기 아들을 가장 분노케 하는 엄마의 말

네 친구들은 왜 죄다 그 모양이냐


코로나 2.5단계가 길어지면서 활동적인 아들이 몸을 배배 꼬면서 무척 힘들어하고 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볕 좋은 주말에 온 가족이 산책이라도 하자고 하면 갖은 핑계를 대며 자기 방에 박혀 있기를 원한다.


중1인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었다. 남편 말로는 5학년이 되면서부터라는데 그 당시는 내가 지방에 근무하던 시기라 아이와 주말에만 같이 있었기에 막내인 아들이 안타깝고 귀엽기만 했다. 아이의 작은 반항들을 이해 못하는 남편을 속이 좁다고 치부했고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2년 전 퇴사를 하고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내 속은 남편의 것보다 더 좁은 지 터질 지경에 이르고 있다.


아들의 6학년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 면담 시 조심스럽게 내게 물으셨었다. '찬이가 누구랑 노는지 아세요?'라고.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한 동네에 살며 5학년 때 더욱 친해져 6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절친들이다. 그런데 선생님에게는 이들이 소위 '문제성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수업시간에 떠들고 과제도 소홀히 하며 학습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아이들이라고 하셨다. 그나마 찬이가 성실한 편이라고, 이런!


아들의 절친들은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아이들이다. 짓궂긴 하지만 인사성 밝고 상냥한 아이들인데 모르는 새 '문제성을 지닌 아이들'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아들이 그 경계선에 있다고.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단체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으려 하고 아침 독서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무엇보다 '그 문제성 있는 아이들과 친한 것이 걱정이 된다'라고 하셨었다. 순응적인 첫째 때에는 절대 들어보지 못한 선생님의 평에 쭈글거리던 시간이었다.


내 아들도 그렇지만 아들의 절친들 또한 한  한 명 보면 그저 축구와 게임을 좋아하는 철없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우르르 우리 집에 몰려와 게임을 할 때 유심히 살펴보아도 욕도 쓰지 않고 다투지도 않으며 예의에 어긋난 행동들도 없었다. 어떤 녀석은 넉살이 좋아 "아줌마, 찬이를 잘 키우셨어요. 리더십 짱이에요."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학교에 모이면 무언가 불안을 조장하나 보다. 학교가 정해놓은 틀에 들어가지 않고 수업 분위기를 흩트려 놓기에 선생님께는 골칫거리인 것이었다.


선생님의 의중을 알기에 '수업 시간에 떠드는 것은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고, 내키지 않아도 제발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라고 어르고 달래 가며 6학년을 잘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내심 중학교에 올라가면 '그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왠 걸, 모두 다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았고 같은 반이 아니어도 놀 때는 그 아이들과 논다. 코로나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여건도 안되니 더욱 그럴 것이다.


얼마 전 중1 담임선생님과도 두근거리며 전화 면담을 했다. 선생님은 잠시 코로나 이야기로 뜸을 들이신 후 아이가 수행과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먼산을 보기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 찬이 그분이 오셨죠? 아구, 힘드시겠어요."라고 위로(?)를 보내주셨다.

왜 한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 이리도 다른지. 엄마께서 시절의 오빠를 볼 때마다 읊조리셨던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선생님과 면담을 끝낸 후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히고는 아들 방으로 향했다. 우아하게 좋은 말로 타일러야지. 숨을 가다듬으며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철없는 것은 핸드폰으친구들과 축구 약속을 잡고 있었다. 가라앉아있 화가 먼지처럼 훅 일었다.


"! 네 친구들은 어째 하나같이 공부는 안 하고 다 노는 애들이야. 왜 다 그 모양이냐고! 엄마는 솔직히 네가 그 애들하고 안 어울렸으면 좋겠어!"


순간 아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동안 수없이 다투며 보아왔던 눈빛들보다 더 어둡고 각도가 다른 눈빛이었다. 순간 당황했다. 아니, 두려웠다. 아, 살가운 내 아가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구나!


"엄마! 내 친구들을 왜 그렇게 말해요?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어요! 공부 못하면 친구도 못 사귀어요? 그리고 내 친구는 내가 정해요. 엄마가 그것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 발 내 방에서 나가주세요. 엄마 말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절대 힘으로는 못 이길 아들이 나를 강제로 방 밖으로 쫓아냈다.


이 소란에 (우리의 소란은 주로 남편이 없는 낮시간에 일어난다) 딸이 눈곱을 떼며 방에서 나왔다.

?라는 눈빛을 보낸다. 내가 답답해하며 여차 저차 말을 하니 딸이 한 숨을 쉬며 말한다.

"엄마, 뇌관을 건들었어요. 도 그랬지만 저 시기는 친구가 거의 모든 것인 시기예요. 친구들을 그렇게 말했으니.. 아고 엄마 왜 그랬어요."

"내가 왜 그렇겠니, 근묵자흑(近墨者黑 )이라잖아,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할까 봐 그렇지."

"엄마 아들이 묵(墨) 일 수도 있잖아요."

"......"

그렇네......

나 역시 '내 자식은 안 그런데 남의 자식 때문에 내 자식이 물든다'는 생각을 지닌 그저 그런 아줌마였다. 귀가 간지러웠다. 남의 자식 탓하지 말고 내 자식이나 제대로 단단히 키우자.

그나저나 아들에게 어떻게 사과를 하지...


방이라도 치워줘야지. 엄마의 잔소리 폭탄 때문에 절대 제 방에 못 들어오게 하는 아들이 샤워하는 틈을 타 녀석의 방에 들어갔다. 역시나 책상 위에는 학원 교재와 귤껍질과 코 푼 휴지들이 홀아비 냄새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정리 좀 하고 살라고 매일 같이 이야기해도 들어먹질 않는다. 자기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다. 쓰레기를 치우고 책상을 정리하다  귀퉁이에서 꼬깃꼬깃 접혀있는 쪽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찬아, 다른 애들이 놀아주지 않아 속상했는데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름을 보니 5학년 때 전학을 와 지금은 절친 무리에 있는 한 아이의 편지였다.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저 놀기 좋아하는 속없는 녀석인 줄만 알았는데 외로운 친구를 감싸줄 줄도 아는 멋진 사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녀석 좀 멋진 걸! 공부 안 하고 놀면 어떤가(이 시기가 짧기만을 바랄 뿐). 나도 포스트잇에 쪽지를 써서 아이 책상 앞 보드에 붙였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샤워를 마친 아들이 헤어 드라이기를 가지러 안방에 들어왔다. 책상 앞 쪽지를 보았는지 나가면서 스치듯 내게 말을 건넨다.

"저도 기준이라는 게 있어요. 남을 괴롭히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아이들하고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 아들, 고맙다.

엄마는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전히 사랑할 거야!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를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모르기도 하고
흔한 경우지만 우리가 주려고 해도 거절을 당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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