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없이도 열정을 태울 수 있을까
열정 페이라니요...
며칠 전, 재직 시 나를 잘 챙겨주시던 P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해보자."
이 말에 두근거렸다. 회사를 떠난 지 햇수로 3년 차. 내가 언제 일이라는 것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기에 이 두근거림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의 진동이기도 했다.
P부장님은 작년 12월에 정년 퇴임하셨는데 재직 시절부터 은퇴 후의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오신 분이다.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고 사내 벤처 과제에서도 채택되어 관련 사업에 대한 야망을 가지셨다. 모대학 겸임교수까지 하고 계시는 열정의 결정체시다.
그런 분이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을 해온 것이다. 추진하시는 사업 아이템을 보니 내가 석사과정 때 전공했던 분야이고 전 직장에서도 담당했던 실무라 내가 봐도 내가 적임자였다. 한껏 부풀어 올랐다.
"와, 부장님. 아이템이 정말 좋아요!"
"그렇지! 대박이지. 그런데 미안하게도 아직 투자 유치를 못해서 얼마간은 무임금이야..."
피시식. 어디선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무임금이라니. 내 연봉이 얼마였는데 무임금이라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 것에 대해, 내 능력을(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인정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쉬고 있는 쉰이라 그러셨을까. 괜히 나이에 대한 자격지심이 뾰족하게 송곳처럼 솟았다.
"부장님... 그런데 둘째 아이가 아직 사춘기 중학생이고 남편이 반대할 것 같아요..."
내가 좋다면 반대할 남편이 아닌데도 그를 팔았다.
눈치를 채셨는지 자료를 더 보내줄 테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하셨다. 나는 그러겠노라 하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한 남편에게 P부장님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도 역시 무임금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더군다나 벤처기업이면 맨 땅에 헤딩해야 돼. 개고생의 시작이지. 게다가 열정 페이라니..."
"자기 열정 페이로 일하려고 그 좋은 회사 나왔어? 아니잖아. 그냥 쉬어."
그렇지, 무료로 에너지를 소모하려고 회사를 나온 것은 아니었지. 자유로운 시간들, 내가 계획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하루를 갈망했었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하다. 돈을 떠나 무언가를 일구어내고자 하는 욕구가 아직도 솟는다. 아들만 아니었다면 페이 없이도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맨 땅에 헤딩하면서까지 일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현실적 마음이 밀고 들어왔다.
그렇게 갈등하는 사이 P부장님은 미국 진출 계획서도 보내오셨다. 정말 꿈꾸는 자의 열정을 못 따라가겠다. 부장님 재직 시절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그가 뿜어내는 갖가지 프로젝트를 해내느라 진을 뺐다. 당장 업무에 필요하지 않은 아이템들도 창조해 내셨다. 무엇이 그를 끊임없이 꿈꾸게 하는지. 이제 연금을 받으며 편히 쉬어도 되실 나이인데. 나보다 열 살이나 많으신 부장님이 뵐 때마다 푸른 냄새가 나는 이유는 이러한 열정 때문이었으리라.
대가 없는 열정은 가능할까.
직장 생활을 할 때 나를 움직였던 원동력은 "돈"이라는 대가였다. 물론 '인정받는 존재감'이라는 무형의 대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마저 보수라는 실질적인 대가가 없었다면 나는 달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가 없는 열정은 가능할까.
글쓰기에 빠졌던 초기, 앉으나 서나 잠을 자나 깨어있으나 온통 문장 속으로 달려갔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말 그대로 열정이 타올랐었다.
그것은 내가 쓴 글이, 나의 삶과 사유가 누군가에게 닿아 공명하는 감동 때문이었다. 열정의 대가는 감동이었고 그러한 대가가 다시 열정을 부르기도 했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저 글을 쓰고 나누는 일들에 감동받았던 초심은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곤 한다.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저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했던 순수의 시절은 가고 눈으로 보이는, 실질적인 대가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벌이가 없는) 글쓰기의 무용(無用)을 깐죽거리며 말하거나 게임과 글쓰기의 재미를 동일시하며 자신의 게임시간을 합리화하는 아들 앞에서 피식 웃고 만다. 동조(同調)의 자조(自嘲)일지도.
지속 가능한 열정, 좋아하는 것을 하며 과정을 즐기는 것
글 쓰는 이들 대부분의 꿈, 목표는 '책 출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목표를 생각하자 마음만 조급해지지 글 쓰는 것이 어려워졌다. '팔릴만한 글'이라는 경계는 나를 경직시켰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닌 쥐어짜는 글이 되려 한다. 모든 글은 내 속에서 나온, 체화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다가왔다.
체화된 콘텐츠 없이 책을 낼 수도 없는 일인데 비교하며 한숨짓고 있었다. 열정을 단번에 식히는 찬물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그 '비교'라는 것은 '교만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초보의 비린내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고 신영복 교수는 '처음처럼'을 강조하셨나 보다. 처음의 겸손, 과정 자체를 즐겼던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 공명하는 감동 자체만으로도 충만하도록. 그렇게 계속 쓰다 보면 나만의 콘텐츠도 자라지 않을까 싶다.
꾸준함에 대한 매일의 다짐들, 열정의 불쏘시개를 지펴본다.
글을 잘 써서 '무엇'인가 되어도 좋지만,
꾸준히 써서 '더 나은 나'가 되어도 좋다
- 서미현 <날마다 그냥 쓰면 된다> 중에서
"부장님, 아이템이 좋아서 곧 투자자가 생길 겁니다. 제가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죄송합니다."
"그래, 할 수 없지 뭐. 언제든 환영이니 마음 바뀌면 연락하고!"
P부장님의 사업이 대박 났으면 좋겠다. 그러한 소문이 들리면 슬그머니 연락을 드려야지. 그때면 열정 페이가 아닌 응당한 보수를 주시겠지. 어쩌면 그가 나를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같은 값이면 젊은 사람을 고용하실 터이니. 나라도 그러할 텐데.
나는 오늘도 자발적 열정 페이로 글을 쓴다. 그리고 그러할 수 있는 이 시간과 이 나이를 사랑하고 만다. 나에게도 푸른 냄새가 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