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퇴사자 엄마가 20대 딸에게 그곳을 권하는 이유

그나마 공기업

by 혜나무


대학 2학년인 딸이 자주 하는 말이 빨리 취직해서 돈 벌어 독립하고 싶단다. 바보. 취직하는 순간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는 있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자유는 구속의 시작 이리라. 나는 딸아이만큼은 월급 생활자가 아닌 자기만의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밥벌이하는 자유로운 생활자였으면 싶다. 내가 못 가본 길에 대한 속 모르는 동경일까? 그러나 굳이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기울지 않은 '공기업'의 밥줄을 잡기를 바란다. 21년 동안 몸담았던 공기업을 자진 퇴사해 버린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공기업이 여자들이 버티기에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기에 딸에게 넌지시 권해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1997년에 H공사에 입사했다 (IMF로 인하여 분할 매각과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명목 하에 2001년 내가 소속된 부문이 5개 공기업으로 분사됨). 명실 공히 대한민국 최대 공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대입 초봉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려웠던 외환위기 시절에 소위 철밥통을 꿰찼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자 자부심이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2018년 가을에 자발적 퇴사를 했지만 사기업을 다니던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더욱 비교되는 우위에 뿌듯함을 느끼며 잘 지내왔다. 지방, 특히 오지에 근무할 수도 있다는 커다란 단점에도 불구하고 딸에게도 공기업을 권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다음 글을 읽을 때 주의사항! 사기업 대비 상대적 우위의 것들 , 에너지 공기업에 대한 사례를 중심으로, 간부가 아닌 평직원 기준으로, 공식적 자료가 아닌 개인적 견해로 작성됨.)

1. 학벌, 학력이 평범하다고 쪼그라들 필요 없다.

솔직히 말해 H공사에 입사하여 적이 놀랬다. 예상외로 직원들의 학벌이나 학력이 높지 않은 것이다. 고졸, 전문대졸, 대학졸, 대학원졸 공채 출신들이 한 부서에 근무하면서 직무의 난이도와는 상관없이 보직이 주어졌다(물론 부서장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당연히 학력에 따른 급여의 호봉 차이는 있다.

나의 처음 보직은 공무였다. 쉽게 말하면 부서의 서무 역할이다. 아무리 신입이래도 석사 출신인데 이런 하찮은(?) 일을 주다니. 처음에는 속으로 투덜투덜 대었으나 비교적 여유롭고 닥달하지 않는 기업 문화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혹자는 전 직원의 수준 하향화라 하지만 업무 내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가는 법. 야망 있는 자들에게는 학벌이나 학력에 상관없이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근래에도 마이스터고 출신들의 고용을 정부에서 주도하면서 기술직 고졸 출신들이 많다. 똘똘하고 제 몫의 일을 거뜬히 해내며 야간 대학을 다니기도 한다. 특히, 고졸 남자 직원들의 경우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군 입대를 하게 된다. 취직을 해놓고 군대를 가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대학 생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루트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2. 피곤한 경쟁은 남의 이야기이다.

사기업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입사 경쟁은 치열하다. 그러나 일단 입사만 한다면 상대적으로 느긋한 회사생활을 누릴 수 있다. 공기업은 주로 기간산업으로서 직접적인 영업활동이 필요 없기에 개인별 실적을 산출하기가 어렵다. 직원 개인 간 치열한 경쟁이 없다는 이야기다.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거나 국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전력, 철도, 토지, 도로 등에 관한 산업을 각각 하나의 조직들이 관리하기에 독과점의 폐해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가 통제권을 행사하기에 국민들에게 저렴하게 공공재를 보급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직원들의 급여는 회사의 정부평가, 소속된 사업소 평가 그리고 개인별 업무 고과 순으로 결정된다. 공기업인 만큼 정부의 평가가 가장 중요하며 회사가 크게 신경을 쓰고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이다. 사업소 평가는 사업소의 부서장들이 챙기면 되고 평직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만 한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3. 속 뒤집히는 일 없이 차장까지는 승진할 수 있다.

어느 조직이나 승진 문제에 있어서 학연, 지연, 혹은 사적 모임 등 여러 가지 끈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공기업의 초급 간부(차장)로의 승격은 공정한 임용시험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업무 고과가 반영되기는 하나 임용시험의 반영률이 커서 극복 가능하다.

문제는 그다음 직급(부장)으로 승진하는 것부터이다. 업무능력은 기본이고(물론 업무능력이 떨어져도 승진되는 사례도 있다), 기타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이루어진다. 조용하게 진행되는, 다소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전쟁이다. 여기서 여성 중급 간부가 적은 이유가 발생한다. 여자들은 정글의 법칙에 취약하다. 이 건은 또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기에 차후에 다루고자 한다.

조직 내 자정 작업들이 있지만 어차피 정성적 평가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그나마 개인의 비위 등을 철저하게 다루기 때문에 사기업에 비해서는 맑지 않을까.


4. 남녀 차별이 적다 (역차별이 있다?).

보직 배치나 인사 고과 등에서 남녀 차별이 적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에너지 공기업의 경우 산업의 특성상 기계, 전기 등 기술직 분야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남자 인력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최근 여자들이 많이 증가하는 것을 보니 채용 시 암묵적인 성 차별은 없는 듯하다. 당연히 급여에서 남녀 차이란 있을 수 없다. 정부의 정책을 반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공기업이다. 단지, 여성 간부 인력이 미미하다는 것이 남녀 차별의 결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여자 직원들이 상대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간부직을 꺼려하고, 회사 또한 정글의 법칙에 익숙한 남자들이 편하기에 여성 간부를 적극적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의 꽃은 승진이고 관리자의 스웩(?) 아니겠는가. 많은 여자 직원들이 원하기는 하지만 여건상 도전하지 못했던 길을 정부가 '여성 간부 할당제'를 도입시켜 넓혀주었다. 즉, 회사가 여자 간부를 육성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초급 간부 임용에서 다양한 인센티브로 여자 직원들의 도전을 유도하고 중급 간부도 일정 비율을 여성으로 임명하고 있다. 남자 직원들에게는 역차별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한다.


5. 기혼자 맞춤형 기업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최우선으로 하는 분위기가 정착되면서 육아 휴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너그러워졌다.

나는 둘째를 낳고 산후풍이 와서 육아 휴직 연장을 원했으나 쌓인 일이 많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시린 몸을 이끌고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그러나 근래에 입사한 여자 직원들은 1년은 기본이고 정부에서 인정하는 육아휴직 3년을 다 쓰는데도 (뒤에서는 모르겠지만 앞에서는) 흔쾌히 승인하는 분위기다. 교사 다음으로 여자들이 아이 키우며 직장 다니기에는 공기업 만한 데가 없다고 본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혼 여성들이 많은 사업소는 전출해 오는 직원들 중 여자를 꺼리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대체 인력이 보충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이 또한 정부가 세밀히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지만 어디 공기업만의 문제이겠는가.

유연근무제 또한 활성화가 잘 되어있다. 일 8시간을 준수하며 출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고, 어린 자녀를 키우는 경우에는 급여를 덜 받고 적은 시간을 일하며 아이를 키울 수도 있다. 원거리 출근자라면 40시간을 준수하며 주 4일 근무도 할 수 있다.


6. 사고 치지 않는 한 내쫓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공기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사기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종종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 데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눈 감아 주는 것이다. 책임감 있고 일 잘하는 사람에게 일이 편중되어 야근을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업무 성과급으로 차별을 둔다 해도 개인별 실적을 정량화하기란 쉽지 않다. 묻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양심상의 문제이다. 물론 공기업도 조직의 생리가 있기에 갑질 하는 상사가 있고 소위 '대의'를 위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버틸 힘이 있고 사고 치지 않는 한 조직은 밀어내지 않는다. 특히 '갑질'의 이슈화로 '갑'들이 몸을 사리고 있기에 버티기가 더욱 수월해지고 있다.


7.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단, 간부가 아니라면)

정시에 퇴근해도 최소한 겉으로는 눈치 주지 않는다. 나 또한 일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퇴근하는 직원들에게까지 그러했다. 급하지 않으면 내일 하면 된다. 어차피 자기 일이니. 그러나 저녁이 있는 삶을 맘 편히 누리고자 한다면 간부는 되지 말기를 권한다. 급여의 차이는 스트레스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간부가 된 후 급여가 급등하는 것은 아니다. 간부가 되어 얻을 수 있는 것은 평직원에 비해 자신이 기획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고 조직의 고급 정보를 얻게 된다는 것과 관리직급이라는 자긍심 정도이다. 대신 더 무거워진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어야 하고 상급자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팀워크가 좋고 제 때 다독일 줄 아는 상사를 만난다면 그러한 것들은 고된 추억거리로 기분 좋게 넘길 수 있다. 도통 자신의 시선만을 고집하고 앞으로 진격하는 상사를 만난다면 고역 중의 고역이 될 것이다. 그의 요구를 위해 야근은 필수다. 나의 저녁이 있는 삶의 여부는 상사가 누구냐가 최대 관건이 될 수 있다.



정부조직과 사기업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정체성을 가진 공기업이라는 조직은 말 그대로 박쥐일 수밖에 없다.

정부의 간섭과 지시를 받고, 해마다 국정감사 시즌이 되면 같은 자료를 반복 요구하는 '나리님들' 때문에 본 업무가 쌓이고, 사기업의 경쟁력을 따라잡아야 한다며 맞지도 않는 갖가지 생산성 향상 기법들을 들이대곤 하는, 혁신이라는 이름하에서 공기업 직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피곤하다. 그러나 요지경의 세상을 날 것으로 살아내는 사기업 직원들보다는 그 피로가 덜하기에 평범한 직장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슬쩍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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