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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란 Jun 06. 2024

엎어진 향수병

머물러준 향기

 마음이 분주한 하루의 시작이다. 오늘은 학교에서 개인 발표가 있는 날이다. 이번 발표는 교양과목의 기말고사 대체 시험이라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서랍장 위에 물건을 올려놓다가 아끼는 향수를 그만 떨어트리고 말았다. 순간 향수병의 뚜껑이 열리며 얼마 남지 않은 향수액이 벽과 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처음엔 닦아내기 아까워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한 날 사용하려고 아껴두었는데 보내야 할 것은 이렇게라도 보내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본의 아니게 온 집안을 채운 향기에 코와 마음이 호강 아닌 호강을 하고 있다.

 발표로 인해 마음이 분주한 날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갑자기 떠오르며 보고 싶었다. 나는 발표자료만 준비하고 연속되는 긴장감과 무기력함에 발표연습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외치면서도 나의 행동에서 반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마음 한편은 불편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선배가 보고 싶었다. 같은 간호학 전공자로 대화가 잘 되고, 삶의 지혜가 많은 사람이다.  언니가 없는 나에게 언니에 대한 로망을 실현시켜 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선배를 더욱 존경하고 잘 따른다.

 나는 오전에 일하고 있는 학교에 방문하여 학생을 케어한 후 근처의 선배가 일하는 고등학교 보건실로 찾아가 간단한 점심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선배는 가족의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 다시 불거졌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위로나 기운 내라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지엽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점심도 굶었을 선배에게 간단한 요기 거리를 조용히 건네주고 싶었다.

 연락을 받고 주차장으로 나온 선배는 제법 뜨거워진 햇살 아래서 윤기 나는 얼굴이 더욱 빛나보였다. 하지만 근심 가득한 얼굴의 그늘은 숨겨지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선배의 공허함을 채워줄 순 없었지만 배는 채워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바깥바람과 햇볕을 느끼길 바랐다. 힘들어도 웃을 거리를 제공해주고 싶었다. 띵동! 배달에 한 번 웃고, 짜잔! 요깃거리 먹으며 한 번 웃고.

그러면 선배의 오늘 하루가 조금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말이다.

오늘 오전에 케어한 학생의 건강 상태도 난조였는데, 선배의 컨디션도 이와 같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아픈 하루였고 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웃음 지었고 나는 오늘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오후 일정이 꽉 찬 나는 시간에 쫓겨 한 손으로 햄버거를 들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발표문 녹음본을 들어가며 서둘러 학교로 이동했다.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나는 때때로 나의 행동이 실속 없어 보여서 스스로가 못마땅하기도 하다.

나는 늘 완벽한 하루를 꿈꾼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분산된 나의 모습에서 완벽함이 흐릿해지며 찌뿌둥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날이 더 많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유연한 삶을 선택했다는 적당한 합의를 한다.  보기 좋은 핑계로 나를 포장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최고가 아닌 최선을! 삶은 향유하는 것이다! 라며.

 드디어 발표시간이 되었다. 다들 ppt가 화려하다 못해 전문가 수준이다. 시사적인 문제를 이렇게 프로페셔널하게 다루다니. 그에 반해 내 ppt는 참으로 초라하고 단조로웠다. 사실 나는 이번 발표는 참여의 뜻만 있었다. 기말시험이기 때문에 이를 미루거나 도망갈 순 없었으니까. 자료준비도 뚝딱, 발표는 준비 없이 그냥 하는 것.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나는 동기들이 눈 감고도 잘 읽힐 어렵지 않은 논제를 선정하여 술술 잘 읽어가며 발표했다.

드디어 발표를 마치고 들어가려는 순간이 왔다.  그런데 끝자리에 않아 경청하고 계시던 교수님께서  앞으로 나오시며 "여러분, 방금 발표자 목소리 어땠나요? 정말 좋지 않았나요? 마치 라디오나 팟캐스트의 진행자 목소리처럼 좋았습니다. 준비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나는 내 목소리를 극히 피하고 싶어 할 만큼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 녹음된 목소리는 듣기 두려울 정도다.

조금은 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

내 마음을 교수님께서 알아차리고 힘을 주시는 걸까? 내 목소리가 좋다고? 나만 몰랐다고? 세상에!!

살아오는 동안  내 목소리에 0.1%의 자신감도 없었는데. 순간 그동안 몰라준 내 목소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긴 세월 동안 몰라줘서 미안해"라고 내 목소리에게 진심의 사과를 청했다.

사실 지난 발표에도 옆 분단 동기가 "혹시 유튜브 채널 운영하시나요? 목소리가 정말 좋으세요"라고 말해서 발표자에 대한 의례적 인사로만 받았는데, 오늘은 교수님께 좋은 목소리 인정합니다 라는 확인 도장을 받은 느낌이다. 향수병이 넘어진 순조롭지 않은 하루의 출발이었지만 이만하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닌 내 마음이 위로받은 느낌이 든다.

집에 돌아와 보니 비록 아끼는 향수는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 향기는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이것 만으로 승리의 기치를 올린 만족한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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