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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Nov 06. 2021

슬럼프를 이겨내는 39가지 방법_3

3. 조금 우울해도 괜찮아

사람을 음악에 비유해 표현할 수 있다면..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드라마 '도깨비'ost에 가까운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굳이 더 세분화하자면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크러쉬의 'Beautiful' 보다는 라쎄린드의 'Hush'에 가깝다고 할까. 오열할 만큼 슬프지도 극적이지도 않고, 마냥 따뜻하고 환하지도 않은, 늘 꿈을 꾸고 희망을 이야기 하지만 약간의 우울을 내재한 그런 사람.


내가 나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우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 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처음에는 내가 가진 우울함 자체를 인정하기 싫었고, 나중에는 그 우울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몰라했다. 차가운 얼음을 손에 쥔 아이처럼 종종걸음을 치면서, 그렇다고 손에 쥔 얼음을 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그 어린아이를 달래주지도 못했다. 한 번 따뜻하게 안아라도 줄 것을. 하지만 나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인스타그램: j_hoooong

때로는 남을 위로해 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더 어렵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데 서툴렀다. 누군가 나 대신 나를 위로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데,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나 자신이다. 자신의 내면의 우울함을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본인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 사람에겐 그 누구의 위로도 잠시의 위안은 될 수 있어도 결국 다 소용없다.


나는 나의 내면의 우울함을 떨쳐 내려고, 잘라 버리려고 정말 무던히도 애썼다. 하지만 늘 슬럼프..ing 중인 내가 내면의 우울함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슬럼프가 어느 순간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 아닌 통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던 그 순간.. 나는 나의 내면의 우울함을 함께 끌어안고 가기로 결정했다. 아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면의 우울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감정 기복이 줄어들었다. 크게 노하지도 슬프지도 않는 평정심이 커졌다.


나는 인터넷 운세를 즐겨 찾아보는 편이다. 운세를 믿는다기 보다 운세의 내용을 읽는 것을 즐긴다. 운세 글에 쓰인 표현들이 재밌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가볍게 흥미 삼아 읽은 수 있는 짧은 글이라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래서 남의 운세를 읽는 것도 좋아한다. (남들이 잘 안 보여주지만 ㅎㅎ) 서른이 넘어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기까지는 정말 매일 읽었던 것 같다.  


아홉수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스물아홉은 참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 인생의 롤러코스터 기간이라고나 할까. 참 변화가 심했다.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신변잡기식 운세라는 것이 대부분 모호하고 중의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스물아홉.. 멀미가 날정도로 극변 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그 당시 오늘의 운세는 모호함과 중의적인 구간의 극과 극을 내달렸다. 나쁜 것은 최악으로 피할 수도 없게 나빴고, 좋은 것은 이게 좋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아주 미미하게 또는 스치듯이 주어졌다.


그 당시의 나는 오늘의 운세를 심심풀이로 본 것도 있지만, 나쁜 것을 미리 조금이라도 대비하고 싶은 마음으로도 읽어 내려갔던 것 같다.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피할 수 없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끔 말이다. 당시 나는 하루하루가 살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기에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위안과 안정을 얻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천년 가까이 산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 소녀에게 말한다. "천 년 만 년 가는 슬픔이 어딨겠어."라고 말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신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어떤 존재가 아니고서야, 사람은 누구나 힘든 시기를 겪곤 한다. 하지만,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시간도 결국엔 그 끝이 있다. 절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행복한 순간도 결국엔 지나가듯 말이다.


내가 나의 내면의 우울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신기하게도 오늘의 운세가 조금씩 말랑하게 다가왔다.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견딜 만 해지는 수준이었고, 좋은 것도 소소하지만 기쁨을 느낄 정도로 다가왔다.


예전 영화 중에 배우 김영철, 이병헌, 신민아가 출연한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요즘은 사딸라로 더 유명한 배우 김영철의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영화 속 대사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나는 그 대사보다 영화 속 이 내레이션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저 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상황과 시기가 조금씩 좋아져서 오늘의 운세가 다르게 느껴졌을까. 나의 마음 상태와 마음 가짐이 변했기 때문에 오늘의 운세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을까.  


꼭 매일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그러더라.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거다'라고. 행복은 미끄러운 비누와 같아서,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잡히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행복에 집착하면 할수록 내면의 우울함도 커진다. 그래서 행복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SNS에 올라온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일상에 우울함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SNS에 올라온 수많은 행복한 사진과 글은 편집된 '사실'이다. 그것들은 '진실'의 일부일 순 있어도 '진실'은 아니다. 나는 SNS가 일종의 런웨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디자이너가 가봉되지 않은 옷을 혹은 마음에 차지 않는 옷을 런웨이에 올리겠는가. 간혹 SNS에 올라온 누군가의 슬픔과 우울함마저 실제론 편집된 슬픔이다. 그 누가 공개된 장소에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들에게 자신의 온전한 슬픔과 치부.. 내면 깊은 우울함을 내비치겠는가.


동화 '파랑새' 속 주인공은 파랑새를 찾아서 떠돈다.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파랑새는 자신의 집 안에 있었다. 동화 속 파랑새는 행복을 뜻한다. 우리는 가끔 동화 '파랑새' 속 주인공처럼 행복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을 가늠하는 마음속 잣대를 스스로 너무 키우는 것이다. '이 정도는 돼야 행복이랄 수 있지 않겠어?', '지금 정도를 행복이라 하기엔 너무 소소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내 마음 안의 행복을 재는 잣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에게 주어진 소소한 행복의 소중함을 놓쳐버리기 쉽다. 그리고 그 놓쳐버린 행복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고,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SNS를 공개 계정과 비공개 계정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공개 계정에는 일적인 내용을 주로 올리고 비공개 계정에는 지극히 사적인 내용의 사진과 글을 업로드한다. 그리고, 비공개 계정은 철저히 내 자랑으로 꾸며져 있다. 내가 특별히 행복했던 기쁘고 좋았던 날의 기억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SNS 친구를 맺고 있는 지인들은 내 비공계 SNS를 보고 나의 일상을 부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 소위 말하는 정말로 자주 만나고 가까운 '찐친'들은 대부분 그렇게까지 부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편집되지 않는 나의 일상을 아는 사람들 이니깐. 나의 일상이 굉장히 평범하고 또, 때때로 어떤 순간은 정말 진흙탕 같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깐.  


그럼에도 내가 SNS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재미와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편집된 일상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구경도 할 수 있고, 또 나의 잘 정돈된 SNS를 보고 가끔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 나에게도 이렇게 좋았던 날들도 있었어. 반짝반짝 빛나던 그 순간들이 있었어.'라고 말이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어가면서 좋은 것 하나가 바로 '망각'인데, 나쁜 점도 그 '망각'이다. 어떤 현상과 자극에 점점 무뎌져서 나쁜 일을 금방 잊는 장점도 있지만, 좋았던 일도 나도 모르게 그저 '기억'으로만 남아버리곤 할 때가 있다. 좋았던 그 순간의 느낌을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좋았던 그 순간순간들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초등학교 입학의 그 설레던 순간의 감각을 서른 살 넘어서까지 그대로 간직하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어떠한 매개체(SNS 기록 이랄지.. 앨범 속 사진이랄지... 등등)로 인해서 '망각'했던 좋았던 순간들이 상기되기도 한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인.싸'들이 넘치는 세계인 SNS를 그런 용도로 이용하고 있다. SNS를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가지각색 이겠지만, 편집된 타인의 일상에 나의 일상을 비춰보거나 그들보다 더 나아지려고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 유명한 퍼거슨 감독처럼 SNS가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의 일상과 진짜 행복은 SNS 창.. 밖에 있다. 그 사실만큼은 우리가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 영화 중에서 이런 영화도 있다. 임수정과 비가 출연했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 흥행실패 한 몇 안 되는 작품이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직접 영화관에서 가서 할인 한 푼 안 받고 봤던 영화다. (요즘 말로 내 돈 내산? ㅎㅎ) 영화 속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냥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영화를 관통하는 이 메시지는 참 슬픈 말인 동시에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팬들 사이에 배운 변태로 불리는 박찬욱 감독표 위로. 나는 그 메시지에 담긴 위로가 좋았다.


모든 사람이 다 '인.싸'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 '인.싸'조차도 어느 순간 우울감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 이니깐. 늘 웃을 수 있는 것은 인형이나 로봇 정도겠지. 우리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우울한 것은 당연하다.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냥 조금 그런 날인 것이다. 조금 지친 그런 상태인 것이다.  


나는 박찬욱 감독처럼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늘 우울한.. 어쩌면 내일 우울할 여러분에게 '그라시아 표' 위로를 건네고 싶다. "우울해도 괜찮아." , "그냥 우울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인스타그램: j_hoo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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