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참회의 기록
스스로를 한 걸음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다 해도 난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14년 전 교사로 처음 발을 내딛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럭저럭 잘 버텨 왔는데, 돌이켜 보면 잘 하고 싶고 잘 되고 싶은 나의 욕망에 비하면 참 정체되어 있는 것 같다.
읽고 싶은 텍스트들은 쏟아져 나오고, 난 늘 무언가를 읽고 있지만 그 흐름으르 따라가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느낌. 아이들이 잠든 그 순간부터 부리나케 정리를 하고 텍스트를 마주하지만 나를 둘러싼 텍스트의 산은 너무나 거대하다. 이러한 사실에 버거움을 느끼다가도, 내가 마주할 수 있는 텍스트가 무궁하다는 사실에 한편으론 가슴이 벅차오른다. 마치 도서관 서가를 거닐 때의 그 느낌 같다고 할까. 시인들은 계속 새로운 시를 쓰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소설가들은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비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읽고 느끼며, 때로는 학생들과 나눈다. 나의 발걸음은 정말 작은데 텍스트들의 걸음걸이는 크게 느껴져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 내가 가진 물리적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할 수 있는 텍스트들은 한정적. 조금 더 영롱한 글들을 만나는 데 나의 온 우주를 집중해야겠다.
'우리들의 문학시간'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수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학생들과 실제 수업을 한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 아직 1장을 읽었을 뿐인데 내 수업과 교사 생활을 돌아보게 만든다. 임용 첫해에는 영화와 논술을 결합해서 '영화로 배우는 논술' 수업도 기획해 보고, 실제로 한 재미있게 수업했던 기억이 있다. 수시로 보충 수업이 있었고 야자감독까지 해야 하는 빡빡한 일상에서 번외로 수업을 맡아 품이 많이 드는 수업을 계획하는 것이 꽤 부담이었음에도, 당시에는 그저 재미있는 수업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런 열정은 사라지고, 적은 수업 시수와 좀더 편한 과목을 찾게 된 것 같아 부끄럽고 작아진다. 학생들과 도서관에서 함께 수많은 시집을 펼쳐 놓고 좋은 시를 찾고 느낌을 적어보는 수업 장면을 책에서 읽으면서, 내가 꿈꿔오던 수업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난 과연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잘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수업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창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것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늘 더 잘하고 싶다. 내가 정체되었던 것은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인생의 커다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고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도 하고 싶다. 순수하게 재미있는 수업을 꿈꾸던 열정, 지적으로 무언가를 탐구하고 싶은 열정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근본적으로 그것들을 잘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찌 보면 참 축복받은 직업. 교과만 생각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문학 작품을 읽고 함께 느끼는 것이 나의 일이다. 이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시작해 볼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누구보다 내가 수업을 즐길 수 있도록.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수업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