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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Oct 16. 2020

[서평]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소설집을 읽은 후, 그의 필력에 반해서 다른 책을 찾아 읽게 된 것이 바로 ‘자기 앞의 생’. 그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펴낸 작품이다. 단편집들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이 작품은 읽는 며칠의 시간 동안 놀랍게 나를 빨아들였고 주인공 모모의 세계에 잠시 살게 해 주었다.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로자 아줌마’, 그리고 로자 아줌마가 맡고 있는 몇몇 아이들 중 한명인 ‘모모’와의 특별한 관계가 그려진다. 세상 끝에서 소외된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 로자 아줌마는 칠층 층계를 못 오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겨우 열한 살인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면 빈민 구제소로 가야 할 상황. 하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 옆에 끝까지 남아 그녀를 위로하고, 사랑한다.

모모의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는데, 그 덕에 그 작은 소년이 생에 대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세심하게 전달된다.


30p.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그러고는 길가에 주저앉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65p.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곳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어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사고 있는 것 같았다.


72p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둥지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중략)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137p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152p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153p.

젊은 창녀들에게는 포주가 있지만 늙은 창녀들에게는 아무도 없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늙은 창녀들만 맡고 싶다.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 이상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 그들을 보살피고 평등하게 대해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178p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79p

자연은 야비한 악당이라서 그들을 야금야금 파먹어간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것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인을 안락사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 그들을 천천히 목 조르고 결국엔 머리에서 눈알이 튀어나오게 될 때까지 내버려두어야 한다.


311p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모모의 세계에서 바라본 로자 아줌마, 그리고 친구인 하밀 할아버지는 야비한 악당인 자연의 법칙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으로 얼마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녹음기처럼, 그들이 생기있고 젊었을 때로 되돌리고 싶을 지경이고. 모모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생 속에, 어쩌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지고 있다고. 자연의 법칙 속에서 나 또한 늙어갈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에 처할 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 자연의 법칙 속에서도, 모모의 말처럼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이 힘이 된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나는 누군가를 서로 사랑해서 여전히 그리워할 수만 있다면..우리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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