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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Oct 16. 2020

[서평]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한 천재 문학가. 그의 대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이제야 읽게 되었다. 짧은 단편 열여섯 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은 인간의 심리,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작품은 인간이나 사회 비판, 풍자의 성격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열여섯 편의 단편 중 기억에 남는 단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 보려 한다.


먼저 표제작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페루의 해변까지 카페를 운영하는 자크 레니에. 해변에는 죽은 새들이 있었고, 그 해변에서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한 여인은 자살 시도를 한다. 그 여인을 구하면서 그는 삶 깊숙한 곳에 숨겨진 희망, 행복의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 희망이 완성되지는 못하지만. 나이든 주인공이 평범하고 고독한 일상 속에 던져진 사건을 통해 내면의 강한 욕구를 마주하는 그 장면이 어쩌면 인간의 보편을 다루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했다. 그는 삶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근복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요.”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 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


‘류트’. 완고하지만 이탈리아의 감미로움이나 태양을 좋아하고, 지중해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듯 내면의 활화산을 가지고 있는 N백작의 이야기. 외교관의 아내가 되는 것이 인생의 종착점인 ‘아내’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악기 류트를 손에 쥐게 되면서 예술에 대한 열정은 타오른다. “삼십 년 동안 완벽한 외교관의 겉모습 속에 예술가가 숨어 있었다는 거죠.”라고 말하는 딸 아이의 말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N백작의 이야기를 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취미활동과 자기계발을 통해 또 다른 자아의 완성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또한 지극히 평범한 삶 속에서도, 항상 예술가를 꿈꾸지 않는가.


‘어떤 휴머니스트’ 가장 재미있었던 단편 중 하나이다. 장난감 공장을 운영하는 ‘칼 뢰비’는 인간성과 질 좋은 시가와 민주주의를 믿는 쾌활한 낙관주의자이다. 전쟁이 터지자, 하인이자 친구인 슈츠 부부가 지하에 은신처를 마련해 주는데, 칼은 상황이 악화되자 신문, 라디오를 모두 거부한다. 바깥 세상과 격리된 채 그는 살아가지만, 전쟁은 끝나고 슈츠 부부는 점점 부유해진다. 칼은 점점 뚱뚱해지고 건강이 악화되지만, 인간성은 결국 승리한다는 신념과 믿음을 잃지 않는다. 

“때때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두 부부와 인류 전체에게 품어온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이들의 얼굴을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그는 양손에 충직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죽어가리라.”하인이 집을 차지한다는 설정은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게 했고, 그가 끝까지 낙관주의자로 살았다는 사실은 냉소를 자아내게 했다.


‘가짜’ 예술작품의 진위를 가리는 것이 직업인 S. 반 고흐의 그림을 구입한 이탈리아 식품회사 대표에게 그의 작품이 위작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어필하며, 결국 위작임을 공표한다. 하지만 무려 스물 두 살 연하인,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내가 결국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매우 충격을 받게 된다. 진짜를 격하게 추구하지만, 결국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가짜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독자인 나도 무척 놀랐다. 물론 이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고.

“당신이 소장한 걸작은 가짜요.”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에게 말하고...관용과 이해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 흐느낌으로 들썩이는 두 어깨, 그런 슬픔 앞에서 자존심의 상처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그는 거의 은둔생활을 하면서, 늘어만 가는 자신의 수집품들에 온전히 헌신하고 있다.


‘역사의 한 페이지’ 사회주의자들의 영혼이 사후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어서 그 세계로 가야한다고 믿는 슈바이크. 그리고 그의 부하는 그것을 또 돕는다. 그들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신념이 존엄한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모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슈바이크는 결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까?

군인들에게 짓밟혀 상처받은 소녀가 함부르크로 가는 길에 다시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려는 동행자의 시선을 다룬 ‘지상의 주민들’. 순수를 꿈꾸지만 고갱의 위작 앞에서 오히려 순수성을 잃고 우스운 처지가 되고 만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자신을 학대한 이에게 오히려 복종하는 이의 이야기를 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열여섯 편의 단편들이 모두 주옥같은 작품들이었고, 거의 모든 작품에 담긴 아이러니와 반전의 매력에 나는 푹 빠져 버렸다. 로맹가리의 진가를 알게 된 소설! 그가 ‘에밀 아자르’로 쓴 ‘자기 앞의 생’도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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