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내 삶의 진열장이 조용히 말해주는 것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유명 셰프들이 연예인의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재료만으로 멋진 요리를 만드는 대결 프로그램.
그런데 나에게 음식보다 더 흥미로운 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튀어나오는 그 사람의 '진짜' 속살이다.
우아한 여가수의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반찬이 쏟아지고,
소탈한 배우의 냉장고엔 트러플과 같은 고급 재료가 줄지어 나온다.
사람이란,
겉으론 알 수 없는 면이 냉장고 속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며칠 전,
문득 내 냉장고를 오래 들여다봤다.
마트에서 열정적으로 사온 브로콜리는 시들어가고,
유통기한이 지난 두유와
반쯤 남은 케이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풍경은 꼭 지금의 나 같았다.
건강해지고 싶지만,
지금은 위로가 더 필요한 상태.
분명 의욕은 있었지만
일상에 치여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 방치된 채 버려야만 하는 것들.
그럼에도 나는,
그때 나를 칭찬하기로 했다.
"그래도 나를 위해, 뭔가를 시도하려 했잖아."
엄마의 냉장고가 떠올랐다.
항상 싱싱한 채소와 기본 반찬,
때로는 아빠를 위한 장조림,
아이들을 위한 소세지 반찬도 들어있던 그 냉장고.
완벽하진 않아도, 늘 '누군가를 위한 준비'로 가득했던 공간.
지금 와서야 알겠다.
엄마가 얼마나 성실하고, 대단한 삶을 살아낸 사람인지.
지금 내 냉장고에는,
요즘 유행하는 연예인이 먹는다는 재료,
예쁜 병에 담긴 외국 소스,
단기간 유행한 건강식품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그 속엔 나도 모르게 흘러가는
나의 관심, 시도, 방황, 흔들림이
전부 들어 있었다.
- 쟁여만 두고 꺼내지 못한 내 마음의 재료들
'언젠가 먹을지도 몰라' 하며 넣어둔 식재료들.
그건 꼭
'언젠가 해볼지도 몰라' 하며 쟁여둔 계획들과 닮아 있다.
365일짜리 온라인 자격증 강의를
마감 한 달 전에 몰아 듣는 나.
그때는 분명 설레는 마음으로 신청했는데
지금은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는 중이다.
계획을 세우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사실 무의식적으로 '좋아보여서' 시작한 일들도 많다.
그 결과,
궁합이 맞지 않아 먹지 못하는 식재료처럼
나를 질식시키는 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이게 번아웃일까, 아니면 미련일까?'
결국,
버리지 못한 건 욕심이 아니라, 미련이었다.
하지만 그 미련의 이면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용기내어 시작해본 흔적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
오늘은 그런 나를 조용히 다독인다.
"한때는 설렜잖아.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 무작정 채우기보다, 내가 원하는 요리를 묻는 일
그럼에도 나는 또 냉장고를 채운다.
이번 주말을 위해, 남편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서.
장을 보며
내가 먹고 싶은 요리를 상상하고,
때로는 재료를 낭비하고,
종종 필요한 걸 빠뜨리기도 하면서
나는 오늘도 내 삶을 요리 중이다.
일주일을 넘겨 정리하는 냉장고는
나의 현재를 돌아보는 루틴이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보석함을 열어 나에게
처녀 때 차셨다던 반지와 시계를 건네주셨었다.
"할머니는 이제 필요없으니, 가지렴."
그 말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비움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그 기억처럼,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도
'무엇을 채울지'가 아니라
'어떤 요리를 하고 싶은지'를 묻는 일이다.
모든 재료가 있어도
굴소스 하나 없으면 요리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먼저 정해야 한다.
"내가 지금 만들고 싶은 요리는 무엇인지."
그걸 알아야
비로소 정말 필요한 재료를 고를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자격증으로, 경험으로, 모양만 번듯한 스펙으로
무작정 채워 넣는다고 완성되는 인생은 없다.
냉장고 문을 닫으며
나는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요리를 만들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