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끔은 빨래처럼 삶도 탈탈 털고 말려야 한다

삶에 젖은 감정은 햇볕에 널어야 마른다.

by 웬디금

삶에 젖은 감정은 햇볕에 널어야 마른다.

— "빨래는 돌렸는데, 널 시간이 없다. 요즘 내마음도 그렇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겠다는 선배 언니가 있었다.

그 시기는 모두가 취업 준비에 올인할 때라, 어린 우리 눈엔 무모한 결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언니가 카페에 앉아 언니네 아버지의 말을 들려줬다.

"일은 평생 하는 건데, 굳이 그렇게 하루 빨리 시작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이 아니면 못할 기회라면, 그걸 먼저 누리는게 맞는 거지."


그렇게 언니는 미국으로 떠났고, 돌아와서 1년의 학기를 더 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바쁘고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돌아보면 20대의 1년쯤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왜 그땐 사회의 기준에 쫓기듯 살았던 걸까.


그때 언니 아버지의 말은,

요즘 선택 앞에 선 20대 동생들에게 내가 종종 꺼내는 조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시간은 없고 일만 많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

20대엔 돈은 없고 시간이 많고,

30대엔 돈은 많고 시간이 없다고.


... 물론 돈이 '많다'는 말엔 이견이 있지만,

확실한 건, 너무 바쁘다는 거다.


성과, 비교, 조직 분위기 속에서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감정의 빨래들은 제대로 널지도 못한 채 쌓여만 갔다.


젖은 감정은 곰팡내를 풍기기 시작했고,

가끔은 그 냄새가 나 자신에게도 퍼졌다.


10대, 20대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며 나도 모르게 무뎌졌다.


무뎌지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 믿었고,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는 말에 나를 억눌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조용해야만 어른인 것도 아니고,

무덤덤해야만 성숙한 것도 아니다.


삶에 젖은 감정일수록, 햇볕에 널어야 마른다.

그리고 어른일수록 그 시간을 더 의도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

멍하니 있기,

음악 듣기,

글쓰기...


그런 작은 햇살이 마음의 습기를 말려준다.


감정도 젖으면 냄새가 난다.
문제는 그걸 모른 채, 젖은 채로 계속 입고 살아간다는 거다.


삶의 얼룩: 실패, 관계의 실수들

— “지워지지 않는 얼룩도, 시간이 지나면 연해진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곱씹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에 얼룩이 많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


신입사원 시절,

걷기대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을 관리했던 때의 일이다.


바쁜 행사 담당 과장님이

"책임감 가지고 운영해보라"는 지령(?)을 내리셨고,

나와 동기를 진심을 다해 준비했다.


2박 3일이나 밤샘 봉사를 해주신 분들이

마지막 날 브랜드 부스를 체험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작은 배려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동기와 함께 부스가 비는 시간대를 분석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정리해 과장님께 보고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일 만들지 마. 가서 자.
봉사자들은 그냥 집에 가라고 해.
그건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호통을 들었다.

어린 마음에 우리는 말없이 울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괜히 나댄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의 얼룩은 오래도록 남아,

어떤 상황에서도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얼룩은 두 가지 선물을 남겼다.


1. 혼났다고 해서, 그 감정에 오래 끙끙대지 않는 힘

2. 나는 저런 방식의 리더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


가끔은 실패의 얼룩이 너무 선명해
다시는 그 옷을 입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옷은,
내 인생 중 가장 따뜻했던 계절을 함께했던 옷이기도 하다.



말리고, 다림질하고, 다시 입는 인생

— "다 말랐다는 건, 이제 다시 입고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주말이 되면,

한 주 동안 입었던 옷들을 세탁한다.


섬세한 옷은 따로,

니트는 니트대로.


정리의 시간은

내 마음도 함께 정화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 주를 위한 블라우스를 다림질한다.


삶의 얼룩을 지우고,

주름을 펴고,

다시 나를 입는다.


건조기 돌리면 안되는 옷들은

빨래집게로 하나하나 널어 탈탈 말린다.


그 집게와 건조대가

마치 나를 붙잡아주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눅눅하고 축 쳐져 있던 나를,
소중한 이들이
살포시 붙잡아 말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한다.


새 옷을 꺼내 입는 기분처럼,

조금 더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삶은 매일 젖고, 매일 마른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과정을 견디며
우리가 결국 다시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