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레시피는 나만의 것
"인생도 요리처럼, 정답보다 내 입맛이 중요했다."
한 때는 '정답'이 존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 커리어 조언서, 워라밸 완성형의 루틴 콘텐츠까지. 어쩌면 그건 '이대로만 살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메뉴판 같았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렇다.
인생에는 정확한 레시피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안정이 최고의 양념이고,
나에겐 도전이야말로 삶의 감칠맛이었다.
– 도전은 내게 가장 잘 맞는 양념이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면 안 되니?"
60년대생 엄마에게 나는 늘 이해하기 어려운 딸이었다.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결혼과 육아까지 차근차근 밟아가는 인생.
그게 엄마가 바란 '이상적인 레시피'였다.
하지만 나는 늘 레시피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동생과 달리,
나는 대학원에 간다고 하질 않나,
취업하자마자 2년 만에 해외로 이직한다고 통보했다.
엄마에게 '이직'이란 단어는
낙오나 불안정, 어쩌면 실패의 다른 말이었다.
"그렇게 옮겨 다니면 어디서 믿어주겠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외쳤다.
"나는 정체되기보다 성장의 기회를 택한 것뿐이야."
해외에서는 이직이 '능력자에게 주어진 선택'였지만,
한국의 채용 문화는 달랐다.
면접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이거였다.
"이직을 여러 번 했네요?"
그 질문 하나가,
내 지난 몇 년 간의 노력과 실적을
한 줄의 숫자로 덮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끊임없이 배워온 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인내 부족'이나 '불안정'으로 읽힌다는 건 서글펐다.
하지만 나는 안다.
한 조직에서 10년 일하며 얻는 깊이가 있다면,
여러 조직을 경험한 나에겐 폭과 속도, 그리고 유연성이 생겼다.
실제로 지금의 회사에서 내가 인정받는 건
그간 거쳐온 조직들과 문화, 일하는 방식,
그리고 함께 일한 동료들과 리더로부터 배운 것들 덕분이다.
지금의 상사와 선배들은 종종 말한다.
"넌 더 이상 '성장'이라는 말이 안 어울려.
배울 게 없어. 이미 너무 잘하잖아."
물론 속으로는 생각한다.
‘그럼 승진… 좀…시켜주시든가요...'
대기업의 보상체계나 인사 시스템은 내가 바꿀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요리해왔는지에 대한 감각이다.
나는 내가 끓인 커리어의 맛을 잘 안다.
누군가에게 '안정'이 달콤한 맛이라면,
나에겐 '도전'이 가장 잘 맞는 양념이었다.
실패해도 다시 레시피를 고치면 되고,
맛이 어중간하면 조미료를 더 넣으면 되는 법이다.
고여 썩지 않기 위해,
나는 지금도 도전이라는 양념을 조금씩 더 넣어가며
나만의 인생 레시피를 완성해가고 있다.
- 끓을 땐 끓고, 식을 땐 식어야 맛이 난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요리는 계란프라이다.
스테인리스 팬에서 완벽한 계란프라이를 하려면 불조절이 생명이다.
조금만 강하면 타버리고,
약하면 흐물거린 채 설익는다.
커리어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에서도 빠르게 끓어오르는 순간이 있었고,
오랜 시간 중불로 푹 끓이는 시절도 있었다.
모든 일이 '센불'로만 되는 건 아니었다.
현재 다니는 국내 대기업에서
어느 날 선배가 한 말이 기억난다.
"결국 오래 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지금은 힘들어도, 버티다 보면 기회가 와."
처음엔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아니, 세상이 이렇게 급변하는데, 무슨 '버티는 게임'인가 싶었다.
나는 늘 기회가 보이면 놓치지 않는 타입이었고,
버틴다는 말은 고여 있는 사람들의 자기합리화처럼 들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조금은 이해된다.
인생에서 원하는 변화는
생각보다 천천히 오기도 하고,
기회는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적이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 든든한 동지가 되기도 하고,
친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내 비밀을 흘리는 예상 밖의 적이 되기도 한다.
당장엔 눈부신 기회처럼 보이던 일도
두고 보면 '덫'일 수 있고,
현타 오던 일은
훗날 나를 기회의 강으로 데려다주는
작은 제비였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안다.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들기보다,
적절한 온도에서 끓이기만 해도 인생은 맛있어진다는 걸.
급할 땐 끓이되,
때로는 중불로 오래 푹 익히는 것도 필요하다.
도전과 열정은 불쏘시개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불이 너무 강하면 금세 타버리고,
너무 약하면 끓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인생이라는 레시피를 끓이는 중이다.
조심스럽게 불을 조절하며,
언제 끓고 언제 식혀야 할지를 배워가는 중이다.
완벽한 계란프라이처럼,
내 커리어도 속은 익고 겉은 바삭한 그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
- 실패한 이직, 그때 알게 된 '진짜 나의 우선순위'
한창 열정을 불태우며 팀장 역할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업 전략부터 인사, 예산까지
하나하나 직접 기획하고 팀도 만들고,
예산을 따고, 팀원을 리드하며 커리어를 설계해 나갔다.
일은 너무 재미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문득,
너무 어린 나이에 리더가 된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잘하고 있는게 맞을까?"
그런 고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연봉을 줄이면서까지
더 큰 조직의 '팀원'으로 이직을 결심했다.
나보다 경험 많은 리더들 곁에서
진짜 '리더십'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새로 들어간 팀의 팀장은 분명 나이도 많고
경력도 풍부했지만,
모든 팀원들에게는 공공의 적 같은 존재였다.
나는 팀장이 아니었기에
이전처럼 주도적으로 바꾸기도 어려웠다.
팀 문화는 무기력했고,
연봉은 줄었고,
나 스스로의 존재감도 사라진 듯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실패한 이직을 한 걸까?"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선택은 실패한 레시피 같았지만,
오히려 커리어 인생에 깊은 향신료가 되어주었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알게 되었다.
- 나이가 많다고 리더십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
- 오래 했다고 존경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
- 리더는 '나이'가 아니라 '경험과 학습'이 만든다는 것
그 시절 내가 감당하지 못했던 팀장 역할도,
지금 생각하면 내 식대로 계속 끓였더라면
제법 깊은 맛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후 나는 다시
나에게 맞는 환경,
제대로 된 보상과 기회를 갖춘 곳으로 이직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나만의 장기조리 커리어를 준비 중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돈보다 경험이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때때로 실패를 통해
내가 진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걸.
삶의 맛, 온도, 향기까지도 말이다.
예전에 파스타를 만들다
소금을 너무 넣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땐 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 실패 덕분에 이제는 안다.
"이쯤이면 딱 적당한 간이다."
실패는 늘 쓴맛만 주는 게 아니다.
때로는 다음 요리의 완벽한 레시피가 되어준다.
- 나의 속도와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요리를 완성해간다
인생은 매 끼니 요리를 해야 하는 나만의 주방 같다.
때로는 화끈하게 볶아야 하고,
어떤 날은 오래오래 끓여야 하며,
또 어떤 날은 불을 꺼둔 채 기다려야 더 깊은 맛이 우러난다.
완벽한 요리보다 더 중요한 건
그날,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해내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정답'이라 불리는 레시피가 넘쳐나지만,
내 식성과 내 경험으로 끓여내야
비로소 진짜 내 인생이 된다.
이직도, 도전도, 실패도
모두 내 커리어를 이루는 재료였고,
그 재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나라는 완성작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주방에서
내 입맛에 맞는 인생 요리를 끓인다.
늘 정답은 없었지만, 늘 내 맛은 있었다.
결국 중요한 건 남의 입맛이 아니라, 내 입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