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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Jul 12. 2017

잘 쓴 글, 못 쓴 글

이사가기 전 부모님이랑 기분내는 차원에서 장어구이를 먹기로 하였다. 장어를 이리저리 뒤집어 구으면서 평평하게 펴져있던 장어고기가 꼬들꼬들하게 말아올라가며 노랗게 익는 것을 보다 생각에 잠겼다. 
최고급 재료인 장어가 적당한 양의 소금을 먹고 적절한 양의 불을 쐬며 30분이라는 시간동안 이리저리 뒤집히며 구워져야 사람의 입에 들어가기 적합한 최상의 맛이 나온다. 그런데 과연 나는 내가 쓰는 글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고 단어를 다듬으며 한자한자 적은 것일까? 일하는 도중, 걷는 도중 떠오르는 단어 몇개를 조합하여 급하게 배설하듯 툭 하고 던져놓은 글들은 아니었나. 

잘 쓴 시의 대명사인 윤동주 선생의 시가 문득 떠올랐다. 좋은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 시인의 시가 더 귀감이 되는 것은 단어만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을 연단하여 글로써 길어내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우주, 난장판과 같은 그 황폐한 터전에서 윤동주는 자갈을 하나씩 줍고 하나하나 다듬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조립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하나씩 단어를 골라 이승으로 승천시켰고 그런 정성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26살의 나이에 작고한 시인의 짧은 삶에서 천금같은 글을 올리는데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을까. 

얕은 글들은 보다보면 절로 비판하는 맘이 생기고 글의 가벼움에 쉽게 질려버린다. 허나 깊이있는 글은 단어 하나하나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무게에 마음속부터 깊이 가라앉고 한자하자 음미하여 읽게된다. 조각조각 나누며 분석하던 태도를 버리고 어느새 글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며 숙연히 그 의미에 흡수되어 버린다. 부분의 흠을 잡아 오류를 증명하고 전체를 비판하는 태도 따위는 감히 취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잘 쓴 글은 서예를 할 때 촘촘히 세워진 붓끝과 같다. 잘 묵은 먹물에 깊이 갈린 벼루에 적셔 바늘처럼 촘촘히 선 붓은 허공마저 채워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뿜어낸다.  
잘 쓴 글은 붙끝과 같이 수렴한다. 이것저것 생각없이 지식과 고민을 발산하지 않고 수많은 난제와 무의미해보이는 단서들 속에서 버리고 취해 단 하나의 무언가로 철저히 수렴한다. 이는 읽는 이마저 수렴하는 작가의 글이라는 길에 세워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게 만든다. 

과연 나는, 매일 글을 쓴다는 것에 안위하여 '내 몫은 다하고 있다' 안주하는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있는가? 나아지곤 있는가? 하나로 수렴하는 글을 쓰고 있는가? 아는 게 많고 좋아하는 분야에 취해 지식과 의견을 마구 배설하고 발산하고 있진 않은가? 쉽게 쓴 글에 공허함이 느껴지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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