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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Sep 08. 2017

때를 놓쳤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다 문득 내가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던 때가 있다. 지식의 틀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배우는 재미, 아는 척 하는데 재미를 들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시들해졌다. 이윽고 지식의 틀에 들어가는 것이 누군가의 노림수라는 생각이 들어 슬슬 발을 빼게 되었다. 그랬더니 책을 보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하기 싫어져버렸다.

공부를 하는 것도 그랬다. 어느 때까지는 그 안에 갇혀 무수한 단어와 공식을 외우며 레고를 조립하듯 하나하나 맞춰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예의 그 틀을 인지하고 난 이후에는 틀 안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운동하는 과정과 그 안의 레일에서 경주하는 과정, 결승선을 끊고 숨을 돌리는 과정까지가 평면도의 그림처럼 한눈에 보였고 그 후로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거기서 멈춰서버리게 되었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손에 닿을 수 없던 시절의 너는 한번 한번 다가설 때마다 혹시나 내 사소한 말실수로 일이 틀어져버릴까 노파심이 들었고 너의 무심함에 눈물을 흘리고 너의 갑작스런 반응에 세상을 다 가진듯 왔다갔다 하던 시절에 나는 분명 너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너라는 바다에 그 끝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수년간 그 갇힌 수족관에서 왔다갔다 왕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저 위에서 나와 너를 한번에 내려볼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다시 너의 물속으로 들어가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철이 들기 전에, 속이 차기 전에 지금 있는 곳에서 결과를 거두라고. 너무 오래 있게되면 모든 것이 시시해져 버린다고 말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나는 영화가, 책이, 글쓰기가, 그리고 너에 이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에 하나씩 조그만 결실을 맺어 나 자신과 대상 사이를 오가야 했었는데 한쪽 세계에 오래있다 그만 질려버렸다. 이제 나는 레드오션이 된 너라는 바다에 살 수 없다. 삶의 끝은 정해져있지 않아도 해야할 때는 정해져 있는 것. 그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 믿어 미루어왔던 내 실수다. 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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