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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nie Volter Mar 10. 2018

쓰죽회 가입 사건

나이 서른 중반이 넘어서 인생을 돌아보면 내가 그렇게 나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부모님의 배경 덕분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상고를 나와 동생들을 부양해야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후 대학입학과 공무원 합격을 거쳐 건설교통부 장관 비서, 보좌관 등을 거쳐 공기업의 수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현재도 평생 현역을 부르짖으며 큰 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다.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좋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고등학교 선생을 하며 아버지를 내조하며 두 분이서 번 수입을 과장 조금 보태서 먹고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모으셨다.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목욕 후 쓴 물을 화장실 바닥이나 베란다 청소, 좌변기 물을 내릴 때 이용하시고 설거지에 사용하는 물도 철저히 바구니 두 개에 미리 담아놓고 쓸 정도로 아끼신다. 가족이 벌어온 돈을 비과세 적금이나 수익성 높은 펀드 등에 분산하여 관리하시고 그렇게 모인 목돈은 부동산 전문가인 아버지가 지정하시는 투자처에 제깍제깍 투자된다. 몇 번의 실수도 있었고 아직 더 지켜봐야 하는 물건도 있지만 부모님이 이룬 재산은 이미 형이나 내가 일반적인 샐러리 활동으로 따라잡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커버린 상태다. 당장 아버지의 연봉이 형과 내 연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높을 정도이니 로또가 되지 않는 한 부모님 재산을 뛰어넘긴 쉽지 않을 것이다.

20대 때는 부모님 덕을 보지 않고 혼자 힘으로 아버지의 지위와 부를 이겨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고 실제로도 그럴 자신이 있었다. 전공공부는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언어나 창작, 기획, 마케팅에 있어 나름 재능이 있다 생각하였고 이는 반도체 회사 생산관리 실무자를 거쳐 두 번의 스타트업에서 팀장 역할을 평균 이상으로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첫 스타트업에서는 일반 샐러리맨이 거두기 어두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어른의 사정으로 그 자리를 버리고 나온 것은 논외로 하자.)

허나 서른 중반의 나이에 도달하고 다양한 업종을 거치는동안 한 길만 묵묵히 걸어온 친구들이 더 높은 연봉과 더 높은 직급에 도달한 상황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는지, 또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과거의 자신감이 많이 감소된 상태다. 나 또한 그러한 현실에 타협한 것인지 이제는 중견기업에서 일하며 과거에 비해 다소 기성적인 일을 하며 퇴근 후의 운동 등 자기관리를 하는 것에 만족하며 안정된 삶을 살길 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나의 심경변화로 은근히 편한 삶을 바라는 요즘 결코 환영하고 싶지 않은 일이 터졌으니 그건 아버지의 쓰죽회 가입 사건이다.

최근 아버지가 읽기 시작한 쓰죽회 추천 도서다. 갓뎀!

올해 구정 때 가정예배를 드린 후 아버지는 형과 나를 보며 뉴스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 기사에는 '욜로는 젊은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어르신들이여, 다 쓰고 죽어라.'라는 극단적이면서 파괴적인 문장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나랑 형은 어이없는 듯 실소하였고 아버지는 흡사 제2의 삶의 목표를 찾으신 것처럼 득의양양하시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니들 딴 생각하고 있음 지금이라도 접고 각자 제 살길 찾그래이. 내는 내 사는 동안 니 엄마랑 같이 다 쓰고 갈기다."

사실 아버지가 이런 노선을 걷게 될 것은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2년 전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극단적인 한국의 압축성장세월이 본인의 인생이었던 아버지는 정치적인 관점에 있어서 청년세대인 나와 형과는 잘 맞지 않았다. 분란을 일으키기보다 주어진 환경에서 돌파구를 찾고 올라가는 삶을 거듭해온 당신의 눈에는 시국과 상황에 불평하며 구조의 변화를 주장하는 우리 형제가 그닥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특히 고등학교 전공 선택부터 대학전공, 취업 등 모든 분기점에서 아버지의 의견과 반대의 길을 걸어온 나는 진상 중에 상진상이었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커버린 자식들의 생각이 바뀌긴 어렵다고 아버지는 생각했던 것일까. 보수정권의 몰락과 탄핵사건을 겪으며 아버지는 집에 들어와 기독교 방송과 골프 방송만 보며 세상의 소식보다는 본인 내면에 관한 생각을 더 하시게 된 것 같고 그 와중에 그 몹쓸 이단같은 '쓰죽회'라는 모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맘대로 안되는 자식들이라면 그냥 신경안쓰고 내 돈 내가 다 쓰고 간다면 된다는 생각을 하셨던걸까.
이제 결혼 6년차에 돌입하여 자식이 생긴 형과 형수님의 경우 그래도 부모님이 좀 신경을 써주려는 것이 보인다. 주마다 가족 외식을 하고 반찬도 자주 챙겨주는 것을 보면 아이가 자라는 동안까지는 형네 가정이 휘청거리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허나 나는? 나는 그동안 여러 직장을 전전하느라 형만큼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경기도 일산 입지좋은 아파트에 덜컥 청약을 넣어 당첨된 것까지는 좋은데 집값을 지불할 여유가 없어 은행대출과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간신히 잔금을 지불하고 매월 꼬박꼬박 빚을 갚아가는 중이다. 이외에도 연금보험 납부액, 비과세 정기적금 등에 상당한 돈이 들어가고 그 외에 남는 돈은 목돈마련 전략을 구사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그동안 드려왔다.(물론 그 이상의 집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특혜를 누리긴 했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것 정도는 그동안의 경력과 개인 능력으로 해낼 수 있지만 나도 가정을 갖게 되면 여러 대안을 준비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부모님의 도움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안될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사실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감해서였는지 나도 아버지를 상대로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다 같이 잘 살자'는 홍익인간 캠페인을 3년동안 해왔다. 아직 막내의 귀여움이 통하는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라는 인사 대신 '아버지 덕 보자, 아버지 덕 보고 편하게 살자'라고 하거나  회사에서 연휴 때 지급되는 각종 상품권과 선물, 상여금 등을 어머니께 드려 교묘히 자금세탁을 해왔다. 그렇게 아버지 당신의 자산 증식에 내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을 계속 어필하였고 쉽게 손을 끊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결국은 못이기는 척 아버지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건만...

쓰죽회. '다 쓰고 죽자'는 그 극단적인 캠페인이 일을 그르쳤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덕 보자, 아버지 덕 보고 편하게 살자"라고 얘기하면 아버지는 "다 쓰고 죽자, 내 돈 다 쓰고 편하게 살다가자"로 되받아치신다. 세대간 대결과 정치풍토의 변화가 우리 집의 화목한 환경마저 바꿔버린 것인가. 더 이상 스타트업 직장인으로서 한 몫의 성공을 바랄 수 없는 일반 샐러리맨이 된 나는 월급 외에 또 다른 무언가를 매우 진지하게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뭘 준비해야 할까.

다 쓰고 죽으라. 저금통에 남은 잔돈까지 다 쓰고 죽으라는 것을 권유하는 쓰죽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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