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눈여겨 보는 사람 중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렇게 취업이 힘든 시점에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다. 거기에 퇴근 후 시간을 영어나 코딩 등 기타 공부를 하며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2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먼 곳을 바라보며 달리는 모습에 나도 자극도 받고 걱정도 한다. 앞으로 살아갈 기력을 다 소진해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나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허나 과거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를 얘기하고픈게 아니다. 되려 그 반대. 같은 노력이라도 더 높은 차원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친구는 퇴근 후 회사 근처 집에서 토익과 오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독학이다. 하루 2시간, 교재와 인터넷 강의를 통해 벌써 3개월 동안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데 점수는 700점대에 갇혀 있다고 한다. 700점대가 낮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토익이라는, 순수 영어실력을 위한 공부가 아닌 성적을 위한 공부를 하는데 3개월이라는 시간을 소요하고 점수가 그대로라는게 문제다. 시험은 어떻게든 정해진 시간에 목표치를 넘겨 끝내는 것이 본질인데 박스권에 점수가 갇혀 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상황이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친구도 동감하지만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지방에 살기 때문이다.
지방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과 지방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난다. 퇴근 후 30분 내로 갈 수 있는 학원도, 모의시험도, 스터디도 구하기 힘들다. 시험 경험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시험장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도, 쪽집게 족보 강의도 없다. 한 개인의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시험이라는 만들어진 미로의 실마리가 너무도 많은데 그 친구는 그것을 손에 쥘 환경 자체가 안 된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도 혼자서 '노력'만 하고 만다.
그래, 지방에 사니까 어쩔 수 없지 라고 끝나기엔 그 친구의 앞날이 매우 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친구의 인식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조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알겠지만 위에 말한 본인의 영역을 벗어난 정보전의 가치를 너무도 쉽게 포기하고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혼자만의 과정에 취해 새로운 영역에 대한 서칭을 게을리 한다. 반복되는 혼자만의 학습만이 노력인 양 믿어버린다. 그게 문제다.
반복 연습하여 자신의 한계를 끌어올리는 것도 노력이겠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을 바꾸려는 연습 외의 시도도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노력이라는 단어를 초월하는 더 중요한 무언가라고 믿는다. 지방에서 토익 점수를 올리고 좀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는 것보다 서울 청약이나 경매시장을 분석하고 청약하여 2~3억 시세차익을 높이는 것이 보다 나은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전자는 숭고한 노력, 후자는 경박한 투기라고 하기에는 우리네 처한 현실이 순수하지 않다. 자본이 노동의 가치를 넘어선 시대에 정보전과 재화의 가치를 파악하려는 과정은 생존 그 자체다. 그에 대한 고민을 간과하고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환경이 그 친구와 그 또래 서울에 사는 어느 누군가와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고 있다.
그 친구와 연락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그래도 계정을 삭제하진 않은지라 가끔 페북이나 인스타에 올라오는 그의 근황을 본다. 여전히 성실히 살아가지만 역시 그 틀을 깨진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자신의 가치관이 부서져 나가는 경험을 하지, 아니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는 계속 그렇게 살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도 그런지 모르겠다. 주변에 삼성, SK를 다니면서도 한 단계 더 나가기 위해 GRE 등의 시험을 준비하며 하버드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며 '요샌 하버드 나와도 국내 대기업 못들어가는데'하고 한 마디로 정리하곤 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 친구의 눈에는 내가 지방에 사는 그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돌이켜본다. 환경과 상황을 바꾸는, 노력이라 부를지 어떤 또 다른 힘이라 부를지 모르는 그 행위에 대해 늘 경각심을 가져야겠다. 지방에 사는 그 아이가 오늘따라 더 생각이 난다.
P.S 1 : 언젠가 지방의 그 친구에게 서울에 와서 직장을 구해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좀 생각해보더니 물가가 비싸고 복잡해서 싫다고 하더라. 생각해보니 나도 유학갈 생각 없냐는 동기의 물음에 똑같이 대답했던 듯 하다. 인생을 바꾸고 싶어하면서도 환경을 바꾸기 싫어하는건 마찬가지구나.
P.S 2 : 주제넘게 뭔가 깨달음에 대한 글을 쓰려 했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 뭔가 해야할 거 같은데 뭘 할지 모르겠네. 경제뉴스 좀 보고 기도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