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마지막에 폭탄을 쥐어야 하는 것은 나
폴 칼라니티가 쓴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신경외과 레지던트의 마지막 해인 서른여섯의 나이에 폐암 4기 판정을 받는다. 그는 의사이자 환자로서 병을 마주한 기록을 담담히 써 내려간다. 자신이 수백 명의 환자들을 진찰하고 그들에게 암 말기 진단과 사망 진단을 내렸던 곳에서, 진찰을 받는 환자가 되어 자신의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눈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던 폴은 의사의 말에 담긴 함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치의와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의사 또한 침착하게 대응하는 폴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한다. 폴은 아픈 와중에도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에게 비극적인 진단 결과를 알려줘야 하는 상황에도 놓인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환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기도 한다. 의사가 아닌 환자의 입장에 서서 그 감정을 헤아려보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환자는 의사에게 떠밀려 지옥을 경험하지만, 정작 그렇게 조치한 의사는 그 지옥을 거의 알지 못한다.”
책에서 묘사된 환자를 존중하는 폴의 우아한 대화와 달리 현실에서 경험하는 환자와 의사 간의 대화는 서로 어긋나는 초고속 독백 같다. 꼭 해야 할 말을 서로 초조하게 안고 있다가 3〜5분이라는 짧은 진료시간 동안 재빠르게 쏟아내야 한다. 환자는 묻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지만 의사의 권위에 위축돼서 물어볼 용기를 내기 쉽지 않다. 어렵사리 입을 뗐는데 무시당하는 경험을 겪기도 한다. 물론 의사 입장에서는 진료시간도 짧은데 환자가 핵심 질문은커녕 중요하지 않은 말들을 하염없이 늘어놓고 있으면 답답할 것이다. 환자와 의사의 대화는 입장과 정보의 차이 때문에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흘러가기 어렵다. 진료실을 나서는 순간 환자는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을 복기하기 바쁘고,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그제야 떠올리면서 아쉬워한다.
대부분의 의사 선생님들은 친절했지만 환자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불쾌하게 만드는 분도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질문을 쏟아내던 시절에 한 병원에서 겪었던 일이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며 인공관절 수술을 하자고 했다. CMT란 병이 있고 근력이 많이 약해서 재활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더니 그는 ‘풋’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더 기분 나쁜 것은 나의 질문에 답을 하기는커녕 마치 들은 적도 없다는 듯 질문 자체를 묵살해버렸다는 점이었다.
질문을 하는 행위가 의사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 우습고 귀찮았을까? 업무가 과중하고 진료시간이 빠듯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환자를 모욕적으로 대하는 의사의 태도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환자가 의사에게 자신의 몸에 관해 질문하는 게 왜 조심하고 송구스럽게 여겨야 할 일인가?
진료실을 나서며 나보다도 더 분통이 터지는 표정으로 화를 꾹꾹 누르며 애써 진정하는 엄마의 표정을 발견했다. 이후 병원은 혼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병원에서 이런 홀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 번의 불쾌한 경험이 주는 감정의 여파는 병원 가는 걸 두렵게 만들었다. 이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을 겪게 될까. 내 몸에 대한 걱정보다 모욕적인 상황에 대한 염려가 더 클 때도 있었다.
수술을 결심한 이후 막막한 긴 여정 앞에 놓인 기분이 들었다. 어떤 수술법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분야의 전문가는 누구인지, 나이가 많고 경험이 축적된 의사가 좋을지, 젊고 앞으로도 쭉 볼 수 있는 의사가 좋을지, 수술의 성공률은 어느 정도인지, 실패 시 재수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평균적인 재활 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후유증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등.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고, 짧은 진료시간 동안 의사 선생님에게 일일이 묻기도 어려웠다. 할 수 있는 일은 인터넷을 검색해 먼저 수술을 받은 다른 환자들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많이 언급하는 병원 몇 개를 골라서 의료 쇼핑을 하듯이 다녔다.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며 때론 마음이 상하고 때론 헛수고를 하는 것 같아 허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을 신뢰하고 어떤 각오로 수술을 해야 할지 마음의 정리가 차곡차곡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경험을 축적하면서 수술을 받기로 결정한 의사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이 얼마나 괜찮은 분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모든 과정에서 군더더기가 없었고, 환자가 질문하면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답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신뢰감이 생겼다. 병원 시스템도 원활하고 체계적으로 느껴졌고, 의사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 팀에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첫인상이 만족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결정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은 병원과 담당 의사 선생님 말고도 많았다. 수술 방법과 쓰이는 재료에 대한 옵션은 물론이고 어느 쪽 다리를 먼저 수술받을지 순서도 정해야 했다. 병원만 선택하면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다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숱한 선택권이 나를 존중해서인지, 아니면 곤란한 결정에 따르는 책임을 환자에게 미루기 위함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게 온당한 일일까? 결정을 내리기까지 환자에게 충분한 정보와 전문적인 견해가 전달되었는가? 수술 경험이 많지 않고 의학 지식이 없는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마치 도박처럼 느껴졌다. 내가 선택했지만 어쩌면 모든 과정은 담당 의사 선생님의 의도대로 끌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게 주어진 옵션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료실의 대화는 마치 폭탄 돌리기 게임을 하듯이 자신이 쥔 순간에 터지지 않게 하려고 재빠르게 순번을 넘기는 과정 같았다. 결국 마지막에 폭탄을 쥐어야 하는 것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