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 흔한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병을 진단받고 충격으로 한동안
흔들렸다. 지난 인생의 모든 선택이 잘못된 것만 같았다. ‘내 상태를 잘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의 리스트는 길고 길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것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육아와 가사, 시댁 경조사 등을 잘 챙길 리 없었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버거워서 허덕거렸다. 아이를 낳고서야 알게 된 병에 대해 시댁에는 말하지 못했다. 걱정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해결책이 없으니 피곤한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혼자 감당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장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심적 고립이었다.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서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면 풀어서 다시 맞추리라. 지금부터라도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주변인들에게 내 위치와 상태를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다. 그 방법으로 장애등록을 떠올렸다. 그러나 스스로도 내가 장애인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과연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겼다. 자신을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종 장애인으로 인식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도 있는데, 그런 경우 대부분 사회가 그들의 어려움을 인정하거나 지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고통의 경험을 인정받고, 몸과 마음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CMT를 진단받은 병원에 가서 ‘장애정도 심사용 진단의뢰서’를 발급받고 싶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 경우는 장애로 인정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요즘 기준이 까다로워졌고, 검사를 받는 비용이 비싸고 고생스러우니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어쨌든 병원에 온 김에 현재 상태를 자세히 알고 싶어서 검사를 진행했다. 다른 검사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시간만 들이면 되었지만, 근전도 검사는 너무 힘들었다. 근육에 바늘을 삽입해서 전기 자극을 주는 검사인데, 전기 자극만도 아픈데 바늘을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고통이 더 심해졌다. 소용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왜 이렇게까지 애쓰고 있나 하는 생각에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고는 처음 진단받았을 때보다 발바닥 근육이 손상되었다고 하셨다. 내 나이 또래의 건강한 여성과 비교하면 근육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대략 30%라며, 경험에 의거한 체감상의 수치라고 답해주셨다. 장애로 인정받으려면 수치가 중요한데, ‘발바닥 근육 70% 손실 추정’이라는 말은 진단의뢰서에 쓸 수 없었다.
모든 자료를 제출하자 나를 직접 만나서 평가해야 한다는 담당 공무원의 전화가 왔다. 집으로 찾아온 담당자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질문지에 답을 적은 후, 지시 사항에 따라 움직이는 내 동작을 녹화했다. 걷기,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동작, 바닥에 쭈그리고 앉기, 제자리 뛰기, 양반 다리 등을 시켰다. 몇 가지는 할 수 없었지만, 걷고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건 무리가 없었다.
담당 공무원은 멀쩡한데 왜 신청했느냐는 식으로 반응했다. 집에 온 손님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재주를 보여주는 서커스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담당 공무원이 인터뷰하고 영상을 찍은 건 10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다. 현실의 나는 시간의 연속체 속에서 존재한다. 내가 실제 겪는 어려움은 단 10분 동안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10분간 나를 평가한 담당 공무원은 내가 가진 증상을 장애등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장애로 판단하지 않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장애등록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불편함을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해야 했을까? 평소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도 넘어졌는데 그날은 왜 그렇게 잘 걸었을까? 담당 공무원이 다녀간 후, 허탈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사실은 나 자신도 다른 사람만큼 장애가 심하지 않은데 엄살을 부린 건 아닌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힘들었다.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고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던 건 아닐까, 사람들에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식만 익히면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왜 스스로 약자의 낙인을 찍으려고 했을까, 자괴감도 들었다.
나는 가정에만 속해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불편함도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만일 내가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었다면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내가 일상생활을 해낸 것은 가족의 헌신적인 도움과 자발적으로 포기했던 활동이 많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욕심 부리지 않고 쉬엄쉬엄, 대충 살기가 생존 전략이었다. 이런 태도로 사회에 나가 타인과 어울리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직장생활을 할 때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속도가 있다. 나는 그 속도를 쫓아가지도 못할 뿐더러 타인의 속도까지 늦추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일반 기업에서 인턴으로 잠깐 일을 했던 적이 있다. 워크숍을 갔는데 등산 일정이 있어서 가지 못하겠다고 하니 직장 선배 중 한 명이 “힘들다고 빼지 말고 같이 가자. 너무 힘들면 내가 붙들어줄게”라고 했다. 나름 선의를 가지고 한 말이겠지만, 내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힘든 상황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얌체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산에 갔다면 벌어졌을 상황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겠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질질 끌려다니듯 겨우 걷다가 나중에는 업히고, 결국은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상황이 되어 구조대의 들것에 실려 나가는 대참사를 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가지 않음으로써 공동체의 평화를 지켜냈지만, (물론 수치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나를 지키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이고 사회생활도 할 줄 모르는 철없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장애등록을 함으로써 내가 원하는 사회적 지원은 이 정도였다. 불필요한 신체 활동의 참여를 거부할 권리, 거부하더라도 내가 속한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부당한 처우를 당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받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수준의 증명이 없으면 원만하게 (내게 불이익이 가지 않게)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받는 낙인이나 혜택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저 아픈 몸으로 살아온 경험 자체를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고, 막연히 상징적인 의미라도 획득하고 싶었다.
장애인의 범주에 속하려면 얼마나 아프고 불편해야 할까?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는 의학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인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사회적 비용을 얼마나 치를 의향이 있는지는 사회 구성원과 합의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아직 합의되지 않은 영역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대로 도움을 구할 수도, 온전히 사회의 속도를 따라갈 수도 없는 사람들은 결국 사각지대에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