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손톱 밑에 박힌 가시
의사 선생님을 통해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모임 장소에 들어섰을 때, 충격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런 보조기나 도구없이 걸어 들어왔던 나와는 달리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아도 심한 다리 변형과 보행 장애를 겪는 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미래였다.
진단을 받고 병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그때만 해도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었다. 나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심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의 이미지만 접하다가 막상 모임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보자 생각보다 심한 병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계에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동일시하며 따라가려고 애썼던, 건강한 (그들이 다 건강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람들만 존재했던 세상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그림자 같은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속으로는 덜덜 떨면서도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환우회 회장님이 본격적인 모임 시작 전에 인사를 건네러 왔다. “처음 오셨지요?” 그녀는 심하게 터벅거렸다. 걸음걸이만 아니면 어디서 본 듯한 학교 선배 같은 익숙한 인상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말을 걸어오자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저는 처음에 왔을 때 기절했어요. 다른 사람들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요”라고 내가 겪고 있던 마음의 혼란을 마치 들여다본 것처럼 정확히 짚어주었다.
회장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CMT 환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병이 유전되었다. 자식이 자신과 같은 병을 얻자 아버지는 그녀를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양육했다고 했다. 몸이 성하지 않은 아이가 나중에 자립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공부를 독하게 시키셨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어서 중년의 남성분이 자기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분은 아버지가 환자였던 것 같은데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병에 대해 잘 몰랐다고 했다. 자신도 마흔이 넘어 증상이 시작되어서, 다행히도 젊은 날에 하고 싶었던 걸 다 했고, 직업 선택에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당신이 의사라 이 병을 연구하는 분들을 돕고 싶다고도 말했다. 가족이 모두 오기도 했는데 엄마는 휠체어를 탔고, 아빠는 간신히 걸었다. 아이들은 보행 장애와 신체 변형이 심해 보였다. 부부는 건강한데 아이가 돌연변이로 CMT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도 있었다.
나는 가계에 환자가 없는 돌연변이였고, 20대 후반에 아이를 낳고서야 진단받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증상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지만 심하지 않았고, 이미 진단받았던 고관절 문제에 가려 잘 모르고 지내왔다. 같은 질병을 앓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막막하고 모호했던 내 병의 빈틈이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가족들에게만큼은 내 상태를 온전히 잘 전달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어도, 내가 겪는 상황을 완벽하게 공유할 수 없었다. 내 상황과 감정이 가닿기도 전에 나와 가족 사이에 벽이 세워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특히 에너지가 많고 활동적이었던 남편과는 생활에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속상한 나머지 “네가 내 몸으로 한 달만 살아봤으면 좋겠어!”라고 울부짖었다. 나의 외침에 남편은 “일주일도 싫어!”라고 모질게 답했는데, 남편의 대답이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드는 구석도 있었다. 내 고통을 얕잡아 보지 않아서였다.
이곳에서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자리에 모여 펼쳐진 것 같았다. 각기 다른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 깊게 들었다. 아픈 몸을 견디며 살아온 이야기를 반기는 분위기를 그곳에서 처음 접했다. 내 고통을 모른다고 원망 섞인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임의 사람들은 병의 증상이나 진행 속도가 제각각이었고, 삶의 조건 또한 균질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어쩌면 이 병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과의 소통만큼이나 차이가 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보편적으로 느껴졌던 CMT 환자들 간의 경험이 어느 순간 미세한 균열이 생겨 벌어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증상이 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꺼내놓기 어려워했다. 자의든 타의든 결혼을 선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가치관도 달랐다. 뒤늦게 진단을 받고 아이에게 유전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경우도 있었고, 모르고 낳았는데 건강한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발병한 사람과 뒤늦게 증상이 발현된 사람은 인생을 즐기고 성취한 정도가 다를 수 있었다. 같은 병을 가졌지만 경험은 달랐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가장 아파하는 법이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리 심하지 않은 정도의 불편함이었을 것이다. 과연 아프다고 이야기해도 될까.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같은 이름의 병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고통은 사소해 보일 것 같아서 자꾸만 내 고통의 크기를 의심해보고 자기 검열을 했다. 그러나 고통의 토너먼트를 하다 보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는다. 고통을 비교하고 경중을 따져서는 그 무엇도 나눌 수 없다. 엄기호는 저서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은 겪는 이에게 절대적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고통 그 자체는 절대적이기에 나의 고통이 너의 고통보다 심하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대화는 소통을 막아버린다.
공감을 바라고 갔던 모임에서 각자의 절규에 잠시 압도되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나와 같은 병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공감대의 틈이 점점 벌어졌다. 같은 병을 앓고 있더라도 서로의 사정이 달랐다. 나의 고통을 알리는 데만 급급해서는 더 이상 나눌 것이 없어 보였다. 그때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함몰된 고통의 소통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고통을 이야기하느라 외로운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가 겪고 있는 외로움, 소외감을 이야기하자 서로의 교집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고군분투하며 느낀 각자의 외로움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CMT를 진단받기 전의 일이다. 친구와 학교 앞 문구점에 앉아서 제본 맡긴 자료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날은 춥고 관절이 뻑뻑하고 아파왔다. 그날은 아픈 게 유독 서럽게 느껴졌다. 친구에게 난 사실 다리가 많이 아파서 학교 다니는 게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살짝 미소를 띠며, 자기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사람들 사이에 앉을 때는 항상 잘 들리는 쪽을 찾아 앉느라고 바쁘다고 했다. 친구가 겪고 있는 일을 그 전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노력은 매끄럽고 우아한 태도에 가려져 있었다. 그제야 친구의 외로움이 보였다. 같은 병을 앓아야만 서로의 아픔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나의 외로움도 그녀의 외로움도 보편적이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되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