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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봄 Jan 02. 2023

27세의 어느 날 무작정 어학연수를 떠났다

영어만 잘하면 인생이 풀릴 줄 알았다

20대 후반을 바라보던 나는 답 없는 인생을 앞두고 무척 슬펐고 또 화가 나 있었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으며, 장기적인 비전도 뭣도 없었다. 중요한 건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뿐이었다. 


잡지출판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방송작가 생활, 좀처럼 밖에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 방송국 스튜디오로 오게 하고 인터뷰까지 성사시키는 일을 잘 해냈다. 나름 인정받던 중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방송작가 일은, 결과적으로 보수는 밑바닥이고 매우 자기 소모적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없어져버렸다. 마음이 항상 조마조마했고 빚쟁이처럼 늘 쫓겼다. 오늘도 하루 치의 나이를 먹는 현실이, 또 내가 뒤처지는 상황이, 느리게 나아가는 내 속도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혼란이 가득한 이 시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벗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통장이 텅 비어 있었다. 


사회생활은 자아를 깎아내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뭘 제안하고 시도하든 거절당하는 게 일상이었고 아무도 나를 아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약아빠지지 못해서 꼭 바닥을 보고야 말았다. 분위기를 보고 중간에 멈췄어야 하는데 계산할 줄 몰라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라디오 게스트에게 쌍욕을 들었다. 그것도 지하철 출구과 연결된 백화점 영화관 입구,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분수대 주변 길거리에서. 어찌나 고함을 질러대는지 사람들이 멈춰 서서 나를 에워쌀 정도였다. 방송국을 찾아오던 중 길을 헤매 헛고생했다는 게 이유였다. 문학하는 사람이 저렇게 저속할 수 있다니. 급기야 나를 때릴 듯 위협적으로 손을 올렸지만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른 척했다. 결국 그날 방송은 펑크가 났고 내가 책임지고 기획 아이템을 찾아 메꿔야 했다.


겨우 생계를 유지할 만큼 적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일을 좋아하면 멍청한 방식으로 사달이 나고야 만다. 나는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고 영혼까지 망가지고 있었다. 쌓아가는 삶이 아니라 날려버리는 인생이었다. 어느 날은 눈물을 글썽이며 양화대교를 걸었다. 앞길이 너무 막막해서. 그때 멈춰 서서 생각했다. ‘나는 왜 착취당하도록 내버려두는가, 난 절대적으로 유일하다, 재생도 되지 않는다, 쉽게 회복되지 않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망가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잘하고 싶어서 애쓰고 너무 많은 것을 허용했더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이건 나를 소멸시키는 길이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사회운동가 멜린다 게이츠는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여성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강한 여성’이다. A woman with a voice is, by definition, a strong woman.


그때 나는 강한 여성이 되기로 했고 몸부림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곧장 서랍을 열어 깊숙이 넣어둔 여권을 펼쳐 만료일을 확인했다. 양말을 꿰어 신고 단정한 셔츠로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나섰다. 만료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여권을 갱신하러 마포구청에 갔다. 번호표를 뽑고 서류 접수를 위해 줄을 섰다. 방금 찍은 여권 사진을 손에 들고서.


일단 무언가를 해야 했다. 현실감각도 없고 수많은 조건과 스펙이라 불리는 높은 숫자들을 올려다보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여권 첫 장을 펼쳐보는 것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행동을 했다. 그러고는 몇 달 뒤 모두 그만두고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영어를 놓은 지 오래된 27세의 어느 날이었다. 가족들에게는 내 결심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대학교 때 못 이룬 한을 이제라도 풀어보겠다고. 다른 세상을 탐색해본 선후배와 동기들에 게는 뭔가 매끈한 분위기가 있었다. 한국의 모든 공채 시험에는 영어 공인 점수가 필요했다. 영어 실력을 획득하면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 나에게는 단단한 입지가 필요했다. 아무나 건드리지 못할 사회적 지위를 얻어야 모든 것이 단박에 정리될 것 같았으니까. 미리미리 영어 점수를 해결해놓지 않은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그저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하면서 틈틈이 유학원 상담을 받았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대비해야 하는지 체크했다. 최소한의 생존영어를 길어 올리기 위해 어학원에 등록했고 매일 영어 회화와 작문 연습을 했다. 집을 정리하고, 보험을 들고,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 국제학생증을 신청했다. 또 필요한 서류는 뭐가 있지? 준비하는 동안 그날 찍은 사진들을 모두 요긴하게 소진했다. 국제운전면허증을 바라보며 약간의 호기를 부렸다. 그래, 멀리 떠나보자. 한계를 정하지 말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 나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애초에 용기가 있어서 시작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무언가에 착수하자 힘이 솟았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공항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가족들은 담담해했다. 인사를 하면서도 정확히 몇 월의 어느 날 이 공항으로 돌아오겠노라 기약할 수 없었다. 대책 없이 떠나는 거니까. 내가 산 건 편도 비행기표니까.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만 맴돌았다. 영어 점수를 올려서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인천공항에서 떠나던 날, 손에는 여권이 쥐어져 있었다. 막막한 마음이 타오르던 그 순간 마포구청으로 달려가 갱신한 새 여권이었다. 처절한 심정으로 양화대교를 걷던 27세의 내가 가장 잘한 일은 그날 여권을 갱신한 것이다. 난 갈망했다. 이게 끝일 수는 없다고. 빳빳한 새 여권을 받아든 그 순간이 어쩌면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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