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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봄 Jan 04. 2023

중요한 건 라이팅 실력이라고!

우리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핸디캡이 있어요

토익 점수가 필요했다. 한국 기업의 공채시험 1차 서류 전형에서는 영어 공인 점수를 제출하라고 하니까. 상황이 급변해 당분간 ‘토익’이라는 숙제에 쫓기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어학연수 중 NGO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때 짐을 정리했다. 한국을 떠나오며 무겁게 챙겨왔던 몇 권의 토익 책도 처분했다. 가장 미련 없이 처리한 물건이 토익 책이었다. 《해커스 토익》 리스닝 편과 리딩 편, 몇 번이나 펼쳐봤을까. 리딩 편은 처분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 제네바로 옮겨와 업무를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되던 날 사무총장 롤란도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근무 환경은 어떤지 일은 잘 진행하고 있는지 질문하며 한마디를 꺼냈다.


“앞으로 업무 메일은 제임스나 캐롤에게 검사받도록 해요.”

“네? 제 이메일을 전부요? 모두 다요?”


콘퍼런스 조직 업무를 신나게 추진하던 차였다. 자존심이 상해서 순간 볼살이 떨렸다. 스태프들이 보내는 모든 이메일은 사무실 공용 이메일 주소를 참조하게 되어 있었다. 즉, 동료들이 내 이메일을 함께 열람한다는 뜻이다. 롤란도가 설명을 이어갔다.


“또래 그룹 사이에서 주고받는 메일은 상관없지만 국제 총재나 지역 대표들과 업무 메일을 주고받을 때엔 형식적인 워딩을 써야 합니다. 오해 없이 정확한 표현을 적어야 하고요. 우리는 국제단체입니다. 대륙마다 분명히 문화 차이가 존재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소재들이 있어요. 이 부분을 훈련받으면서 갈등을 미리 방지하자는 겁니다.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지난주에 내가 보낸 업무 메일이 지나치게 저돌적이어서 아프리카 지역 사무소와 충돌이 날 뻔했었다. “당신들이 일을 지연시켜서 모든 과정이 늦어지고 있으니 다음 주 월요일까지 틀림없이 보내세요”라고 적은 메일이었다. 맞는 표현은 대체 뭘까? “만일 그쪽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음 주 월요일에는 우리가 계속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도울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주십시오.” 이렇게 써야 옳았다. 게다가 내 문장엔 시제가 틀린 부분도 있었고 고압적인 단어도 있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이미 자존심이 상할 만큼 상했는데 이게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라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속이 상해서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상심한 나머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내게 롤란도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우리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핸디캡이 있어요. 나도 우루과이 사람이라 영어가 모국어처럼 원활하지 않죠. 사무총장인 나도 중요한 문서를 작성할 때는 캐롤에게 반드시 검사를 받아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영어 모국어 화자들이 미워졌다. 속이 상해서 며칠 동안 말수가 줄었다. 하긴 그동안 영어 글쓰기는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공적인 글쓰기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업무 이메일은 필요에 따라서 형식을 바꾸어 쓸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정중한 청유형 문장과 외교적 수사를 써야 하는데 나는 그걸 다룰 수 있는 영어 실력이 부족했다. 힘든 마음을 뒤로하고 짧은 메일이든 긴 메일이든 작성 후 캐롤이나 제임스에게 리뷰를 부탁했다. 캐롤의 사무실을 기웃거릴 때마다 어린애 취급받는 것 같아 창피하고 모멸감이 느껴져 며칠 잠적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전히 불평하는 나를 폴린이 멈춰 세웠다.


“뭐가 그렇게 속상하니? 네 글에 첨삭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형식이나 매너도 중요하지. 결국 어느 회사에서나 중요한 건 라이팅 실력이라고. 우리는 모든 걸 문서와 이메일로 이야기하잖아.”


폴린의 말이 맞았다. 내게는 기회였다. 사무실에 영어 선생님이 두 분이나 있다는 거네. 영국 사람 그리고 호주 사람. 이들은 나를 지적하고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거라고. 마음가짐을 바꾸니 갑자기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후 매일매일 뉴스레터에 들어갈 글과 웹사이트에 올릴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써냈고, 제임스와 캐롤은 내글을 빨간 펜으로 고치고 편집하느라 업무가 늘어났다. 하루는 바쁜 제임스를 대신해 폴린에게 영어 수정 요청을 하니 단박에 읽고 피드백이 돌아왔다.


“도대체 뭘 쓴 거니? 하나도 못 알아보겠어. 캐롤이랑 제임스가 지금껏 엄청 고생했겠다.”


자그마치 10개월 동안 두 선생님은 내 영어 작문을 빨간 펜으로 첨삭 지도해주었고, 나의 라이팅 실력은 점증적으로 나아졌다. 문장을 쓰고 ‘검산’을 한 차례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알게 되었다. 폴린은 여전히 엉망이니 더 신경 써서 탈고하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그사이 사무총장 롤란도는 내게 프레젠테이션 업무를 주고 홍보 분야 업무를 더 맡겼다. 조금씩 실력이 나아진다는 확신에 안도감이 생겼다. 축복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빨간색으로 물든 종이들을 모두 모아 바인더에 묶어놓고 책처럼 다시 읽었다. 피에 젖은 나의 성장역사가 따로 없었다. 자주 등장하는 비슷한 오류가 보였다. 기억해두었다가 다음번에는 같은 실수를 줄이려고 애썼다. 선배들이 지적하고 고쳐주는 내용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흡수해나갔다. 두 분의 영어 선생님은 나 때문에 업무가 늘어났는데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가이드해주었으니 두고두고 고마운 은인들이 아닐 수 없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습관을 만들었다.


영어로 이메일을 쓰거나 기획안을 쓸 때 최소 두세 번은 다시 읽어보기. 짧은 이메일도 마찬가지다. 이메일 앞부분에는 상대의 이름을 호명하며 Dear ○○, 혹은 Hi ○○를 쓴 뒤 한 줄을 비우면서 공백을 둔다. 답장이라면 주로 첫 문장은 지난번 메일에 관해 고맙다는 이야기로 운을 띄운다. Thank you for your earlier email. 혹은 안부를 묻는다. 되도록 한문단에 한 가지의 이야기를 한다. 업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문자로 쓰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저렇게 하자’는 요지의 뉘앙스를 살리려면 Would, Could, Should, Let’s를 쓰고 명령조로 들리는 must는 되도록 피한다. 작성을 마치면서 Best regards, 혹은 Regards, 이후 한 칸을 내려와서 ○○ 이름으로 마무리한다.



Dear OO,


Thank you for your earlier email on OO issues.


Could you please finalize this paper until the end of this weekend?

(구체적인 이유와 요청, 동의할 내용을 Let’s, can we로 시작하는 표현을 사용해 완성한다.)


I look forward to hearing from you soon.

(너의 빠른 답변을 기대할게.)


Best regards,

내 이름




다 쓴 후 처음부터 다시 읽어가며 하나씩 짚어보고 더 나은 표현이나 명확한 단어가 없을까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교정한다. 나는 같은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지 않도록 어휘를 달리 표현해보려고 시도했다. 동일한 단어가 반복해 나오면 성의 없어 보인다. 영어로는 이 작업을 Proofreading프루프리딩이라고 부른다. 프루프리딩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면 곧 느껴진다. 그 어떤 기술과 첨단도 꼼꼼함을 못 이긴다는 것을. 가까운 동료한테 보내는 이메일도 성의 있게 한 번 더 확인하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한국어든 영어든 문장이 엉망인 이메일을 받고 나면 대충 썼구나 싶어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쓴 영어 문장이 틀리든 말든 당신이 알아서 재주껏해독하라는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매번 저런 태도로 남에게 미룰 것 같아서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린다. 오타가 있는지도 봐야 한다. 기획안을 받았을 때 문법이나 철자가 틀린 걸 발견하면 작은 오류 하나로도 신뢰도가 떨어진다. 중요한 문서라면 동료한테 부탁해서 한번 검토해줄 수 있는지 묻고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검수를 받는다. 구글 번역기에 적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틀린 맞춤법이나 오타를 짚어준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눈으로라도 한 번은 훑는 게 좋다. 폴린의 말처럼 우리는 모든 걸 문서와 이메일로 이야기하니까. 여러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답장에 답장을 거듭하며 이메일을 회신할 때 제일 먼저 내가 보낸 이메일에 오타나 문법적 실수가 있다면 답변을 받을 때마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모두에게 수신이 된다. 도망칠 구멍도 없고 두고두고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신기하게도 영어 작문을 꼼꼼하게 하다 보니 한국어 글쓰기 실력도 나아졌다. 새로운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시 읽고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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