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어긋난 자리
우리는 아빠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가장 가까웠던 시절 아빠에 대한 나의 기억은 흐릿했고,
가장 멀어진 지금, 아빠는 나를 선명히 기억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아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를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은 어딘가 보석처럼 숨겨져 있을텐데.
내 기억 속 아빠는, 무서웠던 존재, 잘 알지 못했던 누군가였다.
나는 딸이지만, 아빠와 가까웠던 적이 없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아빠는 언제나 크고 무거운 존재였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면, 나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벽 쪽을 향해 돌아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마치 커다란 마법사 같았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 하나면 내 세계는 금세 무너졌고,
그의 손바닥은 하늘을 가릴 만큼 컸다.
도망치는 나를 단숨에 어디든 붙들어 걸어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는 대신, 내 안쪽으로 숨었다
가장 어두운 모서리로.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결계를 깨고 나올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모서리’는 내 몸의 일부처럼 굳어 있었다.
그런 나의 모서리를 어느새 내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거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나는 그 질문에 내 자신이 더 작아졌고, 답을 찾는 사이 말은 버벅였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가운데 자리에 앉는 일이 숨이 막혔다.
너무 밝아서, 나의 구석구석이 들킬까 봐. 무서웠다.
나의 이런 모습은 사람들을 내게서 멀어지게 했다.
결국 사람들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나는 점점 더 혼자가 되어 구석으로 밀려났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교보문고에 갔다.
책들이 나를 에워싼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으면 숨이 쉬어졌다.
책 냄새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엄마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그곳의 작은 조각들은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나를 완전한 존재로 여겨주었다.
그곳에서 에너지를 충전한 나는, 다시 마법사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얼마전, 마법사 아빠는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며 눈을 빛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아빠의 마법은 사라져서 일반 사람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들이 몇 살에 걷는지, 어떤 말을 처음 하는지. 어떤 말로 아빠를 부르는지.
온통 어디서 주워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는 신이 나 있었다.
아빠의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깨달았다.
아빠가 숨겨둔 나를 바라보던 다정한 그 보석같은 눈빛은 아직 아빠 안에서 빛나고 있었구나.
나는 아빠 앞에 서면, 내 안의 작은 소녀를 앞세웠다.
나는 그 뒤에 숨어 웅크린 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마법사가 아닌 아빠를 만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어서, 소녀 뒤에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또 어쩌면,
마법사였던 아빠도, 자신 안에 잃어버린 소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소녀가 몇 살에 걷기 시작했는지,
처음 어떤 단어를 말했는지,
그가 ‘아빠’라고 처음 불린 순간을 기억하는 세계를.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엇갈렸지만,
나는 내 안의 소녀 뒤에 더이상 숨지 않기로 했다.
처음으로 내 진짜 목소리로 말을 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제 처음부터 다시 말을 걸어야 하는 사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