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채색이 된 나, 알록달록해지는 순간(2/2)

#2 화면 밖의 사람들 2/2

by 그래미

나는 무색무취 같은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오늘도 이어폰은 꽂았지만 아무것도 재생하지 않았다.

아무 목적없이 거리를 걸었다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 안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때 문자가 울렸다.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뭐해? 잘지내고 있어?

주말에 시간 되면 오랜만에 한번 보자'


사실 주말에는 좀 쉬고 싶었다.

아니, 쉬는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공부도 밀려 있고, 하루라도 늦어지면 세상에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거대한 세상을 혼자 이겨보려고 애쓰는 보잘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싶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응 그러자'


이 친구와는 또다른 세상이 있다.

나를 디지털화된 소용돌이에서 건저주는 친구다.


카페 구석 자리로 가서 카드 게임도 하고,

흑백 체스판을 꺼내 수를 읽고,

종이와 펜으로 오목을 두기도 했다.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진 사람은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했고, 이긴 사람은 바보라며 놀렸다.


휴대폰은 가방에만 넣어둔 채,

화면 대신 서로의 마음과 표정만 바라보았다.


“넌 아직도 소녀 같아"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알록달록한 색깔 가득한 소녀가 되었다.

시간은 아주 느릿하고 따뜻하게 흘렀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자,

나는 소녀에서 다시 무채색 어른이 되었다.


집에 들어서자, 텔레비전 소리가 먼저 나를 반긴다.

뉴스, 주식, 인플레이션, 드라마 쇼츠, 각종 무수한 채널들이

빠르게 돌아가며 배경음처럼 깔려 있었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과 티비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밥 먹었어?"

"아니"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동안에도 티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와 대화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식사도중 정신없는 티비 소리에 체할것 같았다.


“넌 할 말이 없어?”

내가 물었다.


“뭘 얘기해야 되는데? 그냥 조용히 밥먹자.”

남편은 무미건조하게 이어서 말했다.

“이거 재밌는데 왜 방해해. 티비봐”


우리의 대화는 점점 명령과 보고서,

혹은 회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식당에서도 비슷했다.

그는 음식이 나올 동안, 뉴스 헤드라인을 훑고 숏츠를 봤다.


나와 마주 본 시간이 고작 몇 분도 안 됐다

‘밖으로 나와서까지 그래야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오늘 어땠어?’ 라는 말보다

그는 "오늘 뉴스 봐" 가 더 먼저였고

나는 '이혼하자' 라는 말을 수백번 되뇌였다.


그는 내 얼굴 대신 폰을 바라봤다.

내 하루의 뉴스는 궁금해 하지 않았고,

대신 세상의 뉴스에만 관심이 많았다.


그의 세계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고 존재감은 옅어져 갔다.


나는 불쑥 두려워졌다.

앞으로 이런 삶이 반복된다면,

나는 정말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문득 타자를 치는 내 손가락을 바라봤다.

인기척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집, 화면만 존재하는 세상.


나는 점점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손끝이 바람을 통과할 것처럼 느껴졌다.

만져지지 않는, 어딘가 떠 있는 연기 같았다.


친구와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나를 알록달록한 소녀로 만들어주던 친구의 시선.

그 작은 구석 카페자리였지만, 나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사람이 함께 살아 가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누군가의 시선 안에 있을 때가 아닐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

이렇게 아주 사소한 시선 안에서 조용하게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지도 모른다.

너 여전히 잘 살아 있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