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그림자 밖으로

길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by 그래미

아침 5시 20분.
손목시계에서 조용히 진동이 울렸다.
알람이었다.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눈이 번떡 뜨였다.

이미 욕실에서 샤워 물줄기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이불 속에서 잠든 척 숨을 죽였다.

침대 아래 숨겨둔 검은 바지와 검은 셔츠를 입고, 그 위에 다시 잠옷을 걸쳐 입은 채 조용히 누워 자는 척했다.

핸드폰 화면엔 이미
[택시 호출 완료]
메시지가 깜박이고 있었다.

아침 6시.
남편은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바쁜 일이 있어서 일찍 출근해.”

나는 알고 있었다.
차로 집에서 남편 회사까지 10분, 그 여자 집까지는 15분.

내가 먼저 도착해 카메라를 켜려면 1분도 허비할 수 없었다.
남편이 집을 나서자마자, 잠옷을 거의 찢어내듯 벗고 곧장 택시를 탔다.

차 안에서 손바닥을 꼭 쥐었다 펴며,
몇 번이나 카메라 배터리를 확인했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초라했고, 심장은 목까지 차올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미 수없이 봤으면서도,
이번만은 다를 거라는 남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내가 오해한 거야.’

매일 남편의 어깨 위에는 그림자처럼 마녀가 타고 있었고,
그들은 매일 나의 집으로 함께 들어왔다.

오랜 시간 나는 모든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흘러 나오는 화는 주체할 수 없었다.

마녀 집 근처에 도착했다.
현관문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풀숲 속에 몸을 웅크렸다.
손끝이 떨려 카메라 버튼을 누르기도 힘들었다.
곧 남편 차가 도착했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 심장이 주먹만큼 작아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잘못 본거야'

마녀의 존재를 안지 1년 6개월, 그리고 마녀의 집 앞을 서성이던 긴 시간 동안, 나는 마녀의 덫에 걸린 괴물이 되어갔다.

나의 집은 더 이상 아늑하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겨우 난간만 붙든 도로시가 떠올랐다.
나는 마녀를 물리치기 위해 여정을 떠난 또 다른 도로시였다.

마녀의 집 앞은 현실이었지만, 나는 이상한 마을 속으로 들어온 듯 했다.
풀숲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눈물을 삼키며 손을 떨며 버티던 날들,
푸른 하늘이 지옥의 천장처럼 보이던 그 이상한 마을,
그 천장 아래 나는 하루하루 새로운 존재를 만났다.

풀숲에서 조용히 몸을 숨기던 어느 날,
큰 눈망울을 반짝이며 까만 고양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카메라 화면을 같이 들여다보았다.

‘거기 뭐가 있어?’

하고 묻는 듯한 표정,

나와 함께 몸을 웅크려 화면을 보는 모습에
눈물이 고인 두눈엔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또 다른 날은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를 접으려는 순간, 조용하던 동네 지붕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 5-6 마리가 한꺼번에 까악까악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울음은 신호처럼 내 시선을 끌었고, 그곳으로 남편의 차가 나타났다.
새들의 울음은 나를 숨게 했고, 그 숨김 속에서 또 다른 진실을 보게 했다. 지붕에 앉아 있는 새들을 보며 '고마워' 라고 속삭이기도 했다.

마녀 집 옆에 사는 수염이 덥수룩한 나이든 아저씨도 만났다.
그 아저씨는 마치 도로시가 만난 겁쟁이 사자 같았다.
그는 처음엔 나를 경계했다.
하지만 어느새 묻지 않아도 남편이 언제 왔었고 언제 떠났는지 말해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괜히 말해서 내가 곤란해지지 않겠지?”

하고 걱정스레 중얼거리며 따뜻한 차를 내어주던 그의 손길은,
겁쟁이 사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용기 있는 사자였다.

어느 추운 날에는 낯선 아주머니가 떨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나를 집으로 이끌어 따뜻한 차를 내주며 허수아비처럼 소박하지만 큰 지혜를 나누어주었다.
그 한 잔의 차가, 무너져가던 내 마음을 다시 붙잡아 주었다.

내가 만난 동행자들은 도로시가 만난 허수아비와 나무꾼, 겁쟁이 사자처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 여정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었다.



마침내, 도로시는 마녀를 마주했다.
점심시간, 회사 앞.

나는 마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두려운 척, 모르는 척, 사람들 뒤에 숨었다.
나에겐 그녀가 마녀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소리지르는 내가 마녀로 보였다.
이성을 잃는다는 게 바로 그런 거였다.
남편 역시 달려와 마녀가 아닌 나를 저지했다.

사람들은 마녀를 감싸주었고, 나는 외려 마녀가 되어 버렸다.

얼마 후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 전과 달리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순진한 얼굴을 하던 전과 다르게 내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증거 있어?"

그 얼굴은 ‘마녀’ 그대로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순진한 척, 두려운 척.
하지만 아무도 없자, 가면을 벗고 날 비웃는 모습.
마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마녀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도로시와 달리 내겐 은구두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날 나는 마녀의 덫에서 빠져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내가 아닌, 남편을 믿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오해한 거라고
나를 탓하고, 긁어내고, 상처를 내며 견뎠다.

그러나 부서진 믿음 그리고 마녀가 뿌려놓은 덫 속에서,
나는 죽음과 같은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도로시는 은구두가 있었잖아!
도로시는 은구두 신고 돌아갔잖아!
나는 가족도 없고, 난 아무것도 없어!”

소리치며 어쩌질 못해 목놓아 울었다.

그러다 문득, 착한 마녀 글린다가 떠올랐다.
그녀는 도로시에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갈 힘은 처음부터 네 안에 있었어.
다만 믿지 않았을 뿐이야'

어쩌면 우리 모두 그렇다.
그 힘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자책하기도 하고.
그 힘을 몰라 스스로 생을 떠나버리기도 한다.
혹은 그들이 가진 힘을 모르고 약자를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미 자기 안에 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믿는 순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은구두는 없었지만, 마녀를 쫓았던 시간은 나를 철저히 부수었고, 동시에 나를 만들었다.
나를 강하게 만든 무기는 이미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도로시에게 허수아비와 나무꾼, 사자가 있었다면,
내게는 까만 고양이, 까마귀들, 아저씨, 아주머니가 있었다.

내 안에 있던 강인함,
그리고 그들이 내게 지혜와 용기, 따뜻한 심장을 빌려주었기에,
나는 무너진 자리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은구두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창문을 열고 팔을 뻗었다.
가벼운 공기가 스쳐갔다.
그 짧은 순간이었지만 해방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카메라 대신 펜을 들었다.
이제는 지켜보는 대신 나의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