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 다른 겨울이 찾아온다.
해는 짧아지고, 바람은 차가워졌다.
겨울의 밤은 유난히 빨리 찾아온다.
손끝에 불붙은 성냥개비를 들고 있는 듯 마음이 조급하고 초조해진다.
조급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붉은 벽돌집들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현관 앞에 하나 둘 켜진 조명만을 따라
나는 겁도 없이 인적이 드문 작은 호숫가로 향했다.
일찍 눈을 뜬 달 아래, 벤치 하나가 우두커니 있었다.
그 위에는 누군가 두고 간 회색 목도리가 조용히 걸려 있었다.
차가운 금속 위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목도리는,
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온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나처럼, 이 자리에 앉아 겨울의 밤을 견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잔잔한 호숫가에서 물향기가 불어왔다.
그 안에서 작은 벌레들이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흘렀다.
달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은 눈이 부실 만큼 빛나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유난히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그런걸까,
이 곳의 밤하늘은 마치 까만 머리 사이로 하나둘 반짝이는 흰머리 같았다.
낮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하얀 빛은,
어느새 밤하늘에선 이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의 삶도, 그렇게 조용히 빛나고 있을 텐데.
화창한 낮에는 아무도 그 빛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
나는 잠시 벤치 위의 회색 목도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따뜻함이 사라진 자리에, 달빛이 대신 머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그 호숫가를 찾았다.
그 벤치 앞에는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밤새 내린 서리가 벤치 위에 얇게 내려앉아, 축축해졌을 회색 목도리를
그녀는 두 손으로 꼭 안고 있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어제 벤치에 목도리 두고 가셨나봐요. 어젯밤에 그대로 있었거든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다.
“떠난 남편이 준 거에요, 어제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다시 걸어왔어요.
잃어버린줄 알고...다행히 여기에 있었네요”
할머니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너머로, 그녀의 겨울은 녹아내린 듯했다.
그녀는 남편이 떠난 지 벌써 30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는 다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아직도... 그리워요"
그녀의 주름진 손끝이 목도리를 매만질 때마다, 따뜻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인생은 결국, 남겨두는 일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한때의 따뜻함,
한 조각의 기억이라도 남겨두는 일.
그게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눈으로 본 것 같았다.
이렇게 목도리를 안은 할머니의 모습은
남긴다는 건 결국,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이의 시간 속에 함께 머무는 일이었다.
벤치를 떠나기 전
나는 주머니에서 장갑 한 짝을 꺼내 벤치 위에 그냥 올려두었다.
누군가 정말 추운 겨울, 이걸 끼고 잠시라도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작은 낭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때론 정말 필요한 건 이런 작은 낭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