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되찾은 열쇠

by 그래미

아주 먼 조용한 동네에서 서울에 도착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서울인지 처음 온 사람마냥 빌딩 끝을 쳐다보기도 하고

빵 냄새 나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하나하나 구경했다.


정겨운 사람들의 소리가 반가웠다.

서울은 더 분주하고 더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 돌처럼 박힌 명치 덩어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따뜻한 냄새와 정겨운 소리,

나의 나라 한국에 왔다는 깊은 안도감에도

여전히 이건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이 질문만 몇 번째일까.


남편은 여자가 있지만 나랑 이혼하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남편의 결론은 이랬다.

같이 살되, 각자 인생

터치하지 않기.


이어폰을 손으로 꽉 눌렀다.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서일까.

뭐든 희망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는 말했다.

그냥 각자 인생 살자고!

남편의 언성이 높아져 깜짝 놀라 이어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혼잡한 거리 위로 굴러간 이어폰을 쫓아가는 순간,

남편의 언성으로 한층 더 단단해진 명치 덩어리를 의식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발끝에 차인 이어폰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어폰을 찾느라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나이에 도로 한복판에서 눈물이 났다.


서로 다정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 잃어버린 이어폰 한쪽.

나는 남은 한쪽을 주머니에 넣었다.


쓸모없는 것.

쓸모없는 기능과 마음.

하지만 차마 버릴 수도 없는 미련이었다.


부모님 집으로 들어와 바로 물을 틀어놓고

따뜻한 욕조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손끝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잡혔다.

검은 머리 사이로 하얀 것이 섞여 있었다.


예전엔 한 올만 보여도 놀라서 뽑아냈는데,

이젠 하루 사이에 몇 올씩 자라나는 것 같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자꾸 빠르게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며


갑자기 이상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이건 누구 탓이 아니잖아.

내 몸에서 자라난 것.

내가 겪은 시간과 감정이 만든 흔적.

누구도 대신 가져갈 수 없는 것.


내 명치에 박힌 돌덩이도,

사라지지 않는 답답함도,


남편의 언성에 더 단단해졌던 그 감정들도

모두 결국 내 안에서 생긴 것들이구나.


그런데 나는 그 돌을 남편이 치워주길 바랐고,

그가 해결해주지 않으면 묻고 또 따지며

왜 안 움직이냐고, 왜 가볍게 해주지 않냐고

계속 내 마음의 열쇠를 그에게 쥐여주며 흔들고 있었다.


손끝에서 흰머리가 미끄러져 내려가

배수구 쪽으로 흘러갔다


내 감정의 열쇠는

남편이 만든 게 아니었다


흰머리가 내 몸에서 자란 것처럼,

그 열쇠도 내가 만든 거였다.


애초부터 그는 그 열쇠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으며,


내 열쇠는 그의 마음에 맞는 구조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그 열쇠는 내 손에서 만들어져

내가 건네준 것이었다.


따뜻한 욕조에서 나왔다.

배수구로 흰 머리카락이 흘러갔다.


나도 그렇게 이 열쇠를 흘려보낼 수 있을까.


명치의 덩어리는 여전히 불편했다.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하나 알게 됐다.


그 열쇠는

내가 만든 것이고

내가 건넨 것이었다는 것을.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할 거냐고.

왜 그랬냐고.


그 질문들에

그가 줄 수 있는 답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거울을 봤다.

흰머리가 보였다.

이번엔 뽑지 않았다.


명치의 덩어리는 여전히 있다.

아마 한동안 여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살면서

내 열쇠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