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동시대 미술가의 작품을 만나다!
2024년 9월 21일 토요일 오후, 아트사이드갤러리(Artside Gallery)에서 기욤 티오(Guim Tió)의 개인전 <어린 시절의 태양>을 관람하였다.
전시 제목인 <어린 시절의 태양 Este sol de la infancia>은 20세기 스페인 현대 시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차도(Antonio Machdo, 1875-1939)의 시 “푸른 날들과 어린 시절의 태양 Estos dias azules y este sol de la infancia”에서 따왔다. 어린아이까지는 아니지만 기욤 티오의 그림에서는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데 <어린 시절의 태양>이라는 전시회의 제목은 티오의 작품 세계를 요약해줄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생각된다.
티오는 풍경 시리즈로 스페인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번 <어린 시절의 태양> 전에도 총 17점의 티오의 작품들이 전시되는데 11점이 풍경화로서 풍경화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 하지만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순수 풍경 작품은 <The Other Side>가 유일하고, 나머지 10점은 풍경을 배경으로 크든 작든 인물이 등장한다. 서양 및 동양의 풍경화 전통은 모두 풍경이 그림의 중심 소재이기 때문에 풍경의 비중이 크고 인물은 비교적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표현된다. 이를 통하여 자연의 위대함, 거대함과 불가항력성을 느낄 수 있다. 티오의 풍경 작품들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풍경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으며, 그의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은 자연의 거대함, 숭고함과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의 숙명을 떠올리게 된다.
티오의 풍경화는 전통적인 풍경화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 눈 덮인 높은 산, 장엄한 산을 배경으로 한 호수, 추수를 앞둔 황금빛 들판은 유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티오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이끼 하나 자라지 않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 눈 덮인 허허벌판에 붉은색 슬레이트 지붕의 건물이 외롭게 서 있는 풍경 등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더욱 선호한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풍경은 지구상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만 티오가 보여주는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며 그가 내면의 눈으로 본 상상의 풍경에 가깝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티오의 풍경화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고독한 숙명을 주제로 한다. 둘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을 배경으로 홀로 등장한다. 잠시 멈춰 있는 인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 마치 자기 앞의 풍경을 뚫고 나아가는 게 자신의 숙명이라는 듯이. 이는 모든 인간의 숙명 아닐까?
인간은 각자의 인생을 오롯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부모, 형제, 가족, 배우자와 같은 인생의 동반자가 있을 수 있지만 이들 동반자는 여정의 중간에 나와 헤어질 수 있고, 반대로 새로운 동반자를 만날 수도 있으며, 인생의 새로운 길동무 역시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 누군가와 인생의 여행을 함께 할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없을뿐더러, 나의 인생 여정이 내 동반자의 여정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인생의 길은 오롯이 혼자서 가야 하는 고독한 길이다. 티오의 풍경 그림들은 인간의 삶의 고독한 본질을 꿰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티오의 그림들은 시종일관 지독하게 고독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그림은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다. 라르스 스벤젠(Lars Svendsen, 1970-)은 『외로움의 철학 A Philosophy of Loneliness』(2017)에서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고 밝힌다. 외로움(loneliness)은 부정적인 감정과 연결되지만, 고독(solitude)은 중립적인 개념으로 때로는 긍정적인 감정 상태와 연결되기도 한다.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고 슬프지 않을 수 있다. 고독이 혼자인 상태를 나타내주는 중립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본질을 외로움이라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오롯이 혼자 나아가야 하는 여정이기에 티오는 풍경화라는 회화 장르의 문법을 빌려 ‘자기 앞의 삶(la vie devant soi)’으로 나아가야 하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숙명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기욤 티오의 개인전 <어린 시절의 태양>에는 6점의 인물화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잠을 자거나 침대에 누워 있는 인물을 표현한 <낮잠 La siesta>, <밤 Nit>, <마스크 Mascareta>같은 작품들은 1층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지속적으로 수영이나 다이빙하는 인물들을 그렸는데, 지하 1층 전시장에서는 다이빙하는 여성을 묘사한 <노래 El cant>와 물 안에 다리를 담그고 물이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젊은 남성을 그린 <수선화 Narcís>와 같은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총 17점의 작품들 중 16점은 2024년 완성된 티오의 최신작이지만 그중 1점은 2021년도에 제작되었다. 노란색 비니를 쓴 채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젊은 남성을 그린 2021년 작인 <생각 Pensament>은 이번 전시회의 다른 작품들과 성격이 다른 유일한 작품이다. 하지만 고독한 젊은이의 초상에 대한 티오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주제 및 다른 작품들과 잘 융화되어 전시의 기본적인 취지와 잘 어울리고 있다.
기욤 티오의 작품들은 테크닉적으로도 개성 넘친다. 그는 유화(oil painting)로 작업하지만 최종 작품들은 유화 특유의 묵직한 느낌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밝고 가볍고 산뜻하게 보여 별다른 설명이 없다면 수채화로 작업했다고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실제로 작품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유화 특유의 덧바름 작업을 하지 않고 한 번에 가볍게 붓질을 하여 그림을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욤 티오가 그림의 소재, 주제에 대한 탐구 못지않게 유화라는 재료에 대한 탐구에도 관심이 높은 화가라는 걸 알려주는 단서이다.
총 17점의 작품들 대부분이 인상적이었지만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카론 Caronte>이다. 멀리 거대한 산을 두르고 홀로 작은 배가 떠 있는 붉은색 호수의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알프스 산맥 혹은 북유럽의 전형적인 산골 풍경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멀리 거대한 산을 두고 그 앞에 초목을 두른 강이나 호수 그리고 그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배는 자연 속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이상적인 삶으로 구현한 남종 산수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서양화의 대표적인 재료인 유화와 캔버스를 이용한 풍경화이지만 한지 위에 수묵으로 그려진 동양화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는 점에서 <카론>은 기욤 티오가 <어린 시절의 태양>에서 선보인 17점의 그림들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의 태양>은 지난 2019년에 이어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진행된 기욤 티오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는 2024년 8월 29일 시작되어 9월 28일 토요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지독한 무더위로 전시가 1주일 남은 시점에서 이번 전시를 관람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1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스페인에서 주목받는 젊음 작가 기욤 티오의 작품을 직접 접하고 싶은 분들은 전시가 끝나기 전에 아트사이드갤러리를 방문하여 전시를 관람하시기를 추천드린다. 갤러리 측에 문의한 결과 전시 연장 계획은 없다 하니 늦지 않게 서두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