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리나 언니에게

우리 집 3살 아가의 방향 없고 거침없는 킥보드 질주. "아니야, 너무 빨라. 엄마랑 같이 가야지." 유난히 잽싼 딸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는데 그날은 마주 오는 매서운 속도의 킥보드 운전자 남자아이를 너무 늦게 발견했다. 순식간의 일, 두 아이가 부딪혀 한 명은 고꾸라지고, 한 명은 슬라이딩하며 저만치 나가떨어져 버렸다. 갑자기 번쩍 하며 번개가 치고 곧이어 천둥소리가 나듯 두 엄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졌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두 엄마의 포효에 멋쩍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두 녀석은 킥보드를 깔고 앉아 낄낄대고 있고 엄마들은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하는데 행인들은 무사한 아이들 한번 쳐다보고 우리의 소음이 못마땅하다며 차례차례 눈을 흘기며 지나갔다.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널브러진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남자아이와 엄마가 다가와,

"인사해야지. 현아 인사, 뭐라고 해야 하지? 인사 안 해?"

"엄마, 인사가 아니고 사과야. 사과! 먹는 사과 말고 '미안해' 사과."

"......"

당황스러운 모자의 대화에 우리 아가가 먼저 해맑게 대답한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리나 언니와 아들 현이와의 첫 만남이다. 사실 나는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2년간 줄곧 리나 언니를 지켜봐 왔다. 175센티미터의 나도 약간 올려다보아야 하는 장신에 눈부신 긴 금발,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입체감을 자랑하는 작디작은 얼굴의 소유자 언니를 단지 내 주차장에서 처음 본 뒤로 말이다. 집안이 너무 답답해 무작정 유모차를 끌고 동네 곳곳을 쏘다녔던 나는 언니도 나와 비슷하게 늘 혼자 밖에서 애와 씨름하는 모습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하루에 한 번 꼭 바깥바람을 쐬어야 더부룩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에 맞춰 나가 ‘오늘도 맥도날드에서 밥 먹는구나. 오늘은 애가 어린이집에 안 갔나 보다. 오늘 입은 청바지 정말 잘 어울린다.’ 일부러 언니를 찾았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지...... 혹 언니를 보지 못한 날은 무슨 일 있나 걱정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충돌 사고 인연으로 우리 아가에게는 다섯 살 꽈당 오빠가 생기고, 세 살 귀요미 여동생이 생긴 현이는 함께 신나게 킥보드를 타고, 흙을 파고, 나뭇가지로 비둘기를 서로 잡겠다고 난리 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 언니를 지켜보지 않고 멀리서도 눈에 띄는 서로를 향해 손을 힘차게 흔드는 사이가 되었고 말이다. 육아를 하면 놀이터에서 만나는 아이 엄마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았지만, 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도 질문받는 것도 질색하는 나는 늘 혼자서 아이와 놀고 씨름하는 것을 택했던 것 같다. 이런 나에게 리나 언니는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함께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편한 상대가 되어주었다. 처음에는 언니가 한국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말로 하는 표현이 서툴 뿐 주차 대란인 단지 내에서 의례 벌어지는 사소한 말싸움에 지지 않고 쏟아내는 모습과 한국어로 된 작은 책을 읽는 것을 발견한 뒤로는 그저 나처럼 외로워도 사귐의 귀찮음과 부담감 사이에서 의연한 사람이겠거니 싶어 더욱 언니가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낸 어느 날, 현이가 물었다. "하은아, 너는 성이 뭐야? 김하은? 나는 이현이야. 오빠 따라 해 봐 이 현. 이현!"

제법 대화가 되는 아이들 곁에 서서 나도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리나, 리 나" 수줍게 말하는 언니의 대답에 현이가 신이 나서 거든다.

"우리 엄마는 러시아 사람이에요. 사십 살이고요. 그런데 우리 아빠는 한국 사람이라서 나도 한국사람 맞아요."

준이는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는 아이라 대화 상대로 슬쩍 딸아이를 밀어 넣으며 난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전 은이에요, 서른일곱 살이고요. 언니네요.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눈웃음 지어 보이는 언니를 보며 용기를 내어 한발 다가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누구도 나에게 "한국인?"이라고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뼛속 깊이 이방인이라는 외로움에 질식할 것 같았던 느낌을 난 언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떠올리곤 했었다. 누가 봐도 이방인인 언니는 어쩌면 비슷하지만 더 진한 외로움에 가슴이 먹먹한 날이 많지 않을까 싶어 2년간 수없이 스쳐 지나가며 인사라도 한번 해볼까 망설였던 시간들을 기억해 본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선뜻 ‘언니’라는 단어를 내뱉다니...... 언니가 불쾌해하지는 않을지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지만, 언니는 따뜻한 웃음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용기를 기쁘게 받아주었다.


리나는 언니, 나는 동생이 된 지 반년, 우리는 여전히 인사 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간 놀이터 구석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 가면 언니가 앉아 있든지 내가 앉아있든지 그렇게 우리는 주중에 많은 날은 다섯 번까지 꽉 채우며 만나는 사이이다.


"언니!"

"은이!"

반갑게 인사하며 나란히 벤츠에 앉아 있는 삼십 분 길게는 두어 시간 동안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싸우지 않도록 적당히 중재하며 보내는 쉬는 시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통통 튀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혼자가 아니어서 덜 외롭고 덜 피곤함을 느낀다. 유독 지치고 힘들어 마음이 부대끼는 날에는 가만히 앉아서 멍 때리는 이 시간이 더욱 귀하게만 느껴진다. 언젠가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남편은 그렇게 앉아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리나는 남편과 어떻게 만났는지, 한국 생활은 어떤지 등등 보통은 벌써 물어보고도 남았을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는데,

“안 물어봤는데요. 잘 몰라요......”

“당신은 안 궁금해요? 그럼 그냥 그렇게 앉아만 있는 거예요? 엄청 어색하지 않나? 당신도 참......”

남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언니를 붙잡아두는 것은 아닌지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 보이는 언니의 시선을 오롯이 느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괴로워하며 일부러 후문으로 돌아 들어가 놀이터 앞을 지나가지 않기를 며칠, 그날은 쉬가 마렵다는 난리 치는 아이를 데리고 후문까지 갈 수 없어 놀이터 앞을 바쁘게 지나고 있는데,

“은이! 은이!”

우렁찬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츠에 앉지 않고 서서 까치발을 내딛으며 손을 흔드는 언니를 본 순간. 나는 아이가 오줌이 마렵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언니!!!!!!!!!!!”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휘휘 저으며 한참을 인사했다. 그날 이후 그렇게 언니가 나를 부르는 횟수가 잦아짐을 느꼈을 때부터 나도 언니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굳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게 되었다.


고열, 콧물, 기침 삼중고로 바깥 외출을 더욱 삼갔던 2주의 시간, 언니에게는 전혀 춥지 않은 계절이겠지...... 혼자 덩그러니 벤츠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차 친하게 지내는 경비원 할아버지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다.

“하은 엄마, 그 왜 여기 204동 외국인 여자 있지? 그 여자가 하은 엄마 물어보더라고, 이사 갔냐고. 아 그래서 내가 얘기해 줬지, 하은이 아파서 병원 다니고 집에만 있다고 말이야.”

“아......”

“그 외국인 여자는 거의 밖에만 있는 것 같혀” 아저씨의 혼잣말에 나는 힘주어,

“아저씨, 외국인 여자 아니고 리나 예요, 그 아들은 현이고요.”

울컥하는 마음을 아저씨에게 들킨 것 같아 이내 무척이나 멋쩍어졌지만, 언니를 만나면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말할 용기가 드디어 생긴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언니,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 괜찮아요?”

“언니,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언니, 혹시 시간 있어요? 우리 집에 놀러 올래요?”

......

누군가를 우리 집에 초대한 역사가 없는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지만, 언니를 오랜만에 만나면 왠지 불쑥 이 말부터 나올 것 같다. 언니, 우리 집에 놀러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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