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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by 이열

평소보다 이른 퇴근길, 문득 버스를 타고 싶었다. 익숙한 지하철 대신 오랜만에 타보는 버스, 창밖을 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선택한 루트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문 너머로 펼쳐진 가을 풍경이 단박에 눈길을 붙잡았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 거리에 드리운 나른한 오후의 햇살까지.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의 색채가 온 마음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고개를 내밀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일요일마다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떠돌던 추억이었다.


그때 나는 집에는 성당에 간다고 말하고, 단출하게 버스비만 들고 거리에 나왔다. 가까운 정류장에 맨 처음 도착한 버스에 훌쩍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30분 정도 노선을 따라가다, 다시 반대편 정류장에서 같은 번호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단순하지만 소중한 일탈이었다. 그렇게 창가에 앉아 낯선 길을 지날 때마다 느끼던 설렘은 지금도 생생하다. 버스 안의 공기는 따뜻했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가을바람에는 종종 낙엽과 축축한 흙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버스는 흔들리며 구불구불한 길을 달렸고, 나는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아래로 낙엽들이 휘날렸다. 어떤 낙엽들은 바람에 날리다 버스 유리창에 와 부딪혔다. 투명한 가을 햇살 속에서 단풍잎은 마치 손으로 그린 그림처럼 생생했다. 거리의 사람들도 흥미로웠다. 멋진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신사, 물건이 빼곡히 들어찬 문방구 앞에서 뛰놀던 아이들, 어깨를 움츠린 채 서둘러 길을 걷는 어른들이 모두 하나의 풍경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소소한 장면들이 낯설고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가끔은 버스가 낯선 동네의 시장가를 지나치기도 했다. 생선을 손질하는 아저씨의 손놀림, 달콤한 풀빵 냄새가 풍기는 가판대,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로 가을빛이 스며드는 풍경은 나를 매혹시켰다. 어쩌다 비가 내리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물 방울들이 끊임없이 뒤섞였고, 나는 그 방울이 만들어낸 무늬를 보며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곤 했다. 유리창 너머로 번져 보이던 흐릿한 헤드라이트 불빛마저도 그때는 신비롭게 느껴졌다.


다시 나는 현실로 돌아와 지금 내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새 핸드폰 화면만 내려다보며 버스 창밖 풍경을 놓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이대로라면 유일한 오늘의 가을을 놓쳐버릴 것 같아, 나는 무심코 꺼내 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밖을 바라보기로 했다. 여전히 가을은 아름다웠다. 도심의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은 변했을지 몰라도, 자연의 리듬은 그대로였다. 나뭇잎은 흔들리며 떨어졌고, 그 자리에 새로운 계절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조용히 마음속 결심을 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가끔은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며 가을을 느끼자고. 가는 계절의 풍경은, 흐르는 나의 삶과 닮았다. 때로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 같고, 또 가끔은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가지만,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며 혼자 웃었다. "내 삶도 꽤 괜찮은 풍경이야." 바람이 그 말을 따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가을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내 삶도 충분히 괜찮은 거겠지.



※'24년 11월에 쓴 글입니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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