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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한 곡, 영화 한 편, 그리고 차 한 잔의 여유

시간을 들이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내 안에서 빛난다

by 이열

최근 우연히 보게 된 어느 가수의 CD 사진 한 장.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린 시절의 나였다. 좋아하는 음악이 있으면, 용돈을 모아 CD를 사러 가던 나. 손에 쥔 CD는 소중한 내 친구였고, 친구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선 발걸음이 경쾌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CD 플레이어를 열고, CD를 넣고, 뚜껑을 닫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을 끼운 채 가사집을 넘기며 음악에 몰입하면, 온전히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땐 음악과 지금보다 더 깊게 교감했다. 가사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며 곱씹었고, 앨범 표지가 마음에 들면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마음을 담아 산 CD, 물성을 통해 전해지는 촉감이 그 안에 담긴 가치를 더욱 귀중하게 만들었다.


요즘 나는 스마트폰의 앱을 열어 음악을 듣는다. 앱이 추천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거나, 어디선가 들려온 곡이 좋아 검색해 듣곤 한다. 한동안 흥얼거리다가도, 금세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슷한 감정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시간을 들여 영화를 골랐고, 마음에 드는 영화는 DVD로 소장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장면은 여러 번 돌려보며 영화와 나만의 추억을 간직했다.

하지만 지금은 넷플릭스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추천작들을 넘겨 보다가 지쳐버린다. 다양한 콘텐츠를 너무나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어느새 음악도 영화도 나와 데면데면해진 느낌이다.


‘다도(茶道)’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단순히 차를 끓이고 마시는 행위를 넘어, 형식과 흐름에 철학과 예절, 수양을 담은 전통문화. 차를 즐길 때 따르는 절차와 들이는 정성처럼, 나도 예전엔 음악과 영화를 그렇게 ‘탐미했던’ 것 같다. 차를 우려내듯 시간을 들여 마치 의식을 진행하는 것처럼 절차를 밟았고, 그러면서 더 큰 풍미를 느꼈다.


디지털은 불편함을 제거하며 ‘쉽고 빠르게’를 선사했지만, 깊이도 빼앗아 갔다. 음악, 영화와 같은 콘텐츠는 더 이상 공들여 선택하거나 탐미하는 대상이 아닌, 쉽고 빠르게 소비하고 잊는 것이 되었다.


우리 삶 가운데 어떤 것들은 시간을 내서 품을 들여야만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찻잔 속 향을 느끼듯 나만의 애호를 찾아가고 싶다. 더 느리고 불편하게, 더 깊이 즐겨보려 한다. 그렇다고 CD나 비디오테이프를 구하진 않겠지만.


음악도, 영화도, 차 한 잔의 여유도, 시간을 들이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내 안에서 빛난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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