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주 풍경이 안겨준 어린 날의 속삭임

시간은 순환하며 다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by 이열

제주도의 늦은 오후는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했습니다. 창밖에 펼쳐진 광활한 지평선과, 드문드문 보이는 갈대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어요. 아내와 아이를 태운 차 안, 라디오는 나른한 리듬의 음악을 흘려보냈습니다. 차창 너머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볕이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어요. 온기가 감도는 공기 속에서 차 안은 안온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은 분주했습니다. 어제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던 업무의 여운이 떠오르고, 다음 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어요. 분명 아무것도 아닌 걱정인데, 이 녀석은 순식간에 자가 증식하는 골칫덩어리지요. 좋은 곳에 와서 왜 이러고 있나 스스로 혀를 차고 있을 무렵, 문득 룸미러 속에 비친 아이의 모습이 제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쯤 열린 입술, 햇살에 비친 작은 콧날,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칼까지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듯했어요. 그 모습이 인상 깊어 곱씹다가, 불현듯 과거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차에서 아빠 엄마 뒤에 앉아 있던 저도 비슷했어요. 라디오에서 흐르던 옛날 노래, 차창에 비친 세상의 빛, 그리고 그 빛에 투영된 어린 날의 마음. 그때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걱정도 없었으니,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였습니다. 무심코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제가 지금의 저에게 찾아와 "너도 한때 현재를 살았잖아, 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어요.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순환하며 다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별안간 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고, 이내 그 시절의 평온이 지금의 저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린 나를 마음으로 그리며 조용히 고맙다고 속삭였습니다. “고맙다. 덕분에 나에게도 현재를 사는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아마 앞으로 근심, 걱정이 고개를 들 때마다,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의 저와 지금 아이의 모습일 겁니다.


제주의 햇살 속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을 그렸습니다. 그 한 바퀴 안에 현재가, 그리고 작은 깨달음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는 선물을 놓치지 않기를. 삶은 빛나는 순간들로 채워가는 것이니까요.


keyword
이전 07화힙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