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순환하며 다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주도의 늦은 오후는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했습니다. 창밖에 펼쳐진 광활한 지평선과, 드문드문 보이는 갈대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어요. 아내와 아이를 태운 차 안, 라디오는 나른한 리듬의 음악을 흘려보냈습니다. 차창 너머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볕이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어요. 온기가 감도는 공기 속에서 차 안은 안온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은 분주했습니다. 어제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던 업무의 여운이 떠오르고, 다음 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어요. 분명 아무것도 아닌 걱정인데, 이 녀석은 순식간에 자가 증식하는 골칫덩어리지요. 좋은 곳에 와서 왜 이러고 있나 스스로 혀를 차고 있을 무렵, 문득 룸미러 속에 비친 아이의 모습이 제 시선을 잡아끌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쯤 열린 입술, 햇살에 비친 작은 콧날,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칼까지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아이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듯했어요. 그 모습이 인상 깊어 곱씹다가, 불현듯 과거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차에서 아빠 엄마 뒤에 앉아 있던 저도 비슷했어요. 라디오에서 흐르던 옛날 노래, 차창에 비친 세상의 빛, 그리고 그 빛에 투영된 어린 날의 마음. 그때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걱정도 없었으니,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였습니다. 무심코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제가 지금의 저에게 찾아와 "너도 한때 현재를 살았잖아, 할 수 있어"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어요.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라, 순환하며 다시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별안간 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고, 이내 그 시절의 평온이 지금의 저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린 나를 마음으로 그리며 조용히 고맙다고 속삭였습니다. “고맙다. 덕분에 나에게도 현재를 사는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아마 앞으로 근심, 걱정이 고개를 들 때마다,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의 저와 지금 아이의 모습일 겁니다.
제주의 햇살 속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을 그렸습니다. 그 한 바퀴 안에 현재가, 그리고 작은 깨달음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는 선물을 놓치지 않기를. 삶은 빛나는 순간들로 채워가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