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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건 Mar 15. 2024

들어가기 : 번역되지 않는 이름

번역되지 않은 책, 번역되지 않는 사회

번역되지 않은 책, 번역되지 않는 사회

기획을 시작하며


오래전에 샀지만 아직 읽지 못한 독일어 소설 한 권을 꺼내 들었다. <Apostoloff>. 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책의 표지에는 낯선 제목이 적혀 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본문의 두 번째 페이지를 읽으며 이것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포스톨로프, 이름을 불러보지만 맞는 발음인지 확신할 수 없다. 이름과 소리는 번역되지 않는다. 


소설은 달리는 자동차 안의 세 사람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세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 그리고 루멘 아포스톨로프라는 낯선 이름이 불리고, 낯선 도시가 나타난다. Veliko Tarnovo. 도로는 벨리코 타르노보로 향하고 있다. 내 스마트폰이 이곳이 불가리아의 한 도시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독일어로 쓰인 독일어 소설을 읽고 있지만 이야기의 배경은 내가 잘 알 수 없는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독일과 불가리아의 우정이 만들어낸 아이들이다.“ 세 번째 페이지에서 이야기가 독일과 불가리아 사이의 사건, 혹은 인물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 표지로 돌아가 작가의 이름을 살펴본다. Sibylle Lewitscharoff. 독일의 주요 문학상들을 수상한 작가 시빌레 레비츠샤로프. 불가리아계 이민자 아버지를 가진 레비츠샤로프. 


독일에는 9만 명이 넘는 불가리아계 이민자가 살고 있으며, 이중 절반가량이 독일 시민권을 갖고 있다. 불가리아뿐만 아니다. 독일에는 다양한 이민자 집단이 살고 있다(참고: https://www.ildaro.com/9735). 나는 독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몇 년이 지나서야 독일 또한 이민자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1년 기준 독일 인구 중 이민자 배경을 가진 사람의 비중은 약 2,200만 명으로 27%에 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현대 독일 소설 중 상당수가 ‚이민자 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한국에 번역된 것으로는 사샤 스타니시츠의 소설 <출신>이 대표적이다. 아무 생각 없이 독일 소설의 책장을 열었다가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로 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비셰그라드. 2차 세계대전, 68혁명, 베를린 장벽, 통일 같은 사건과 상징만이 독일 문학의 주요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고 내전 또한 독일 문학의 배경이 될 수 있다.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읽는 일은 많은 어려움을 수반한다. 언어의 한계도 있지만, 경험의 한계도 있다. 독일과 불가리아의 관계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이다. 어떤 독일어 소설을 읽기 위해서 나는 불가리아를 생각해야 했다.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읽기 위해서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사회, 내가 경험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을 더듬어야 한다. 적어도 좋은 책이라면 적혀 있는 글자 수보다 무수히 많은 다른 것을 담고 있다. 물론 한국어로 쓰인 책이라고 해서 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정도의 차이는 존재한다.


우연한 계기로 2016년 말부터 한국 언론에 독일 사회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사이 독일과 관련된 책도 한 권 썼다. 덕분에 독일 사회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고, 사건보다는 배경을 보는 방법, 현재보다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자매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독일에서 출발해 불가리아를 향해 간다. 그곳은 낯선 곳이지만 시간은 미래만이 아니라 과거를 향해서도 간다. 그리고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은 독일과 불가리아가 뒤섞여 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몇 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기에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독자가 아니라면 번역은 그냥 글자를 옮기는 행위 이상이 되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책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색은 희미해지게 된다. 좋은 독자는 책이 가진 물리적 두께보다 더 두터운 내용을 읽으려고 책과 책의 외부를 오고 간다.


내가 관심 있는 책을 번역하는 것은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커다란 바램 중 하나이다. 좋은 독자이자, 생산자가 되는 것. 나는 앞으로 이어질 글을 통해 아직 번역되지 않은 독일어책을 소개할 것이다. 사회과학, 역사, 철학, 교양, 시사, 문학. 관심이 있고 나눌 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가능한 다양한 책을 소개해 볼 계획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만을 소개하지는 않은 것이다. 책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회, 사건, 사람을 더듬어가는 일을 함께해보려 한다. 언젠가는 그 책 중 한 권이 번역되기를 바라면서. 언젠가는 내가 그 책 중 한 권의 번역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김인건 -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잠시 대안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한국에 뿌리가 없어 독일행을 택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철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면서 번역과 언론 기사 작성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책을 번역했고, 독일 녹색당의 역사에 관한 책 한 권을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저술했다.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번역을 업으로 삼고 싶어 한다. 좋은 독자이자 생산자가 되고 싶다.움벨트’라는 연구 모임에서 독일의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프로젝트 글쓰기와 번역 작업을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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