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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Jan 03. 2022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 이야기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현대 인류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분업과 교환이었다. 


한쪽에서는 풍부하게 발생되는 것이 한쪽에서는 진귀한 물건으로 대접받는 경우가 있다. 


이를 양쪽이 교환하게 될 경우 새로운 경제적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아가 새로운 물건을 재창조해내는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수렵과 농경문화 시절에는 교환이 크게 발생되지 못했다. 


육로로의 이동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과 동시에 제한적인 물건만을 이동시킬 수 있어서 이동하는 과정에서 너무 큰 비용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의 항해 기술과 선박 제조 기술 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지금은 무역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항구 도시가 태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무역은 우리 생활에 큰 부분이 되었다. 


그런 무역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에 그 안에 핵심적인 일은 결국 어떤 상품을 이동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과거에 발생되었던 무역 상품의 종류를 볼 때에 사람들이 선호하고 큰 상품가치를 지녔던 물건 다섯 가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럼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은 무엇이 있었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Ⅰ. 소금


인류의 문명은 소금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요소로 물 식량과 불 이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소금과 땔감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류는 물가 근처 식량과 소금을 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여 살게 되었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가 모두 농사가 가능하며 주변에 소금이 나는 강 하류에서 발원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도 밀농사가 가능하고 주변 지하수에서 소금물이 올라오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하류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소금은 수렵 위주의 원시적 생활을 하던 시대에는 중요한 자원이 아니었다.


동물 고기에는 기본적인 염분이 포함되어 있어 육식을 하던 시대에는 따로 소금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수렵 대신 농사를 짓는 농경생활하게 되면서 생리적으로 소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페니키아 인들은 이집트 소금 호수에서 조염을 가져와 물에 녹여 정재염을 만든 최초의 민족이다.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이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이 대부분이어서 소금 생산지가 많지 않았다.


다른 지역은 대체적으로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소금 생산이 어려웠다.


그만큼 소금은 희귀할 수밖에 없었고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 페니키아 인들은 소금을 다른 민족들에게 더 비싸게 팔았다.


소금은 올리브유 포도주, 마른 생선과 더불어 페니키아 최초의 국제 무역 상품이었다.


페니키아 무역의 근원은 소금인 셈이었다. 소금은 변질되지 않으므로 장거리 교역이 가능했다.


지중해는 가장 값싼 운반 수단이 해운을 제공했다. 페니키아 인들은 소금을 갈리아 지방이나 잉글랜드처럼 먼 곳까지 나가 더 비싸게 팔았다.


소금은 생산지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더 비쌌다. 이에 따라 원양항해가 발달했다.


태양과 바람의 축복, 천일염


소금은 바닷가에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지만 그렇지 않다.


바닷물에는 소금이 약 2.5% 그 밖의 광물이 약 1% 정도 들어 있다. 


바닷물에서 천일염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염전을 꾸밀 수 있는 갯벌 있어야 한다.


게다가 갯벌이 넓고 적당한 조수간만의 차가 있어야 계단식 염전을 만들기 알맞다.


계단식 염전에서는 잇따라 있는 염전에 바닷물 옮겨 담아 가며 증발시켜서 소금을 넣는다.


바닷물에 있는 여러 가지 광물이 가라앉는 속도는 각각 다른데 대부분의 광물은 소금보다 먼저 가라앉기 때문에 바닷물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마다 다른 광물들은 바닥에 닿게 된다.


전 세계 이러한 갯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염전이 가능하려면 물을 빨리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덥고 건조해야 한다.


한 마디로 햇볕과 기온이 좋아야 한다. 한 해동안 연평균 기온이 25도 안팎이어서 물에 증발량이 일정 기준 이상이어야 하고 건기 우기가 뚜렷해야 한다.


그리고 비가 적고 주변에 큰 산지가 없어 적당한 바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는 소금은 순도가 95에서 98% 정도 된다.


이와 같은 조건이 지역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지중해 연안 일부 인도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및 한국 등 극히 제한되어 있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세계 5대 갯벌 하나이며 아시아 대륙에 유일한 대형 갯벌이다.


이 방식으로 제조된 소금을 천일염이라 한다. 


게다가 옛날에는 지하에 묻혀 있는 암염층에서 소금을 파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옛날에 제일 좋은 소금이 그리 귀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바닷가 염전에서 얻는 소금은 전체 소금 생산량의 37%에 불과하다.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소금 가운데 61% 정도는 땅속에서 얻는다


소금을 지배하는 자, 세상을 얻다. 


소금이라는 말 자체가 귀하다는 뜻으로 작은 금, 소금에서 유래했다.


한반도 소금의 수요는 중국 대륙은 물론 태양과 긴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만들었다.


가는 길에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에 각별한 무장이 필요했다. 대개는 상인들의 안전을 지켜 줄 호위대로 구성했다.


당시 상업의 실상은 이처럼 무역과 교역이 혼합된 상태였다. 소금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소금은 돈으로도 쓰였다. 중국에서는 소금을 틀에 넣어 굳혀 동전처럼 만든 후 황제 문양을 새겨 화폐로 이용하기로 했다.


소금이 바로 돈이었다. 소금은 이런 경제적 용도 이외에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무기로 쓰였다.


고조선을 맹주로 하는 연맹 체제와 제후국 관계는 고조선이 소금과 철의 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손쉽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또한 소금 상인으로 알려진 연타발과 그의 딸 소서노의 재력이 없었다면 주몽이 고구려 건국에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금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얻었다.


 Ⅱ. 모피


모피, 세상을 움직이다. 


모피가 세상을 바꾸었다. 모피 사냥 덕분에 개발된 곳이 동토의 땅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다.


유럽에서 모피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중세 동방무역을 주도했던 유대인들이 의해서였다.


당시 유럽인들은 귀족들을 위해 동물을 사냥했다. 사냥 대상은 다람쥐, 산 족제비, 담비, 여우 등 주로 작은 동물이었고 사람들은 모피를 손상 없이 벗겨내기 위해 덫을 설치해 동물을 산채로 잡았다.


외투 한 벌을 만들려면 다람쥐 수 백 마리 여우 수십 마리가 필요해 엄청난 숫자의 동물이 죽임을 당했다.


근대 들어 모피는 귀족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애용하는 패션이 되었다.


결국 서유럽에서 모피 동물이 멸종위기를 막자 사람들은 시베리아와 더 먼 극지까지 개발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국제무역 시스템이 갖춰졌다. 이런 국제무역은 근대 초기의 러시아가 시베리아까지 땅을 넓힐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이었다.


모피 사냥꾼들의 시베리아 개척 속도는 군대 진격 속도보다도 빨랐다.


모피 무역은 러시아의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러시아는 단비 비버 늑대 여우 다람쥐 산토끼까지고 수출했다.


일례로 러시아의 다람쥐 모피 무역이 절정이 이루었던 14세기에서 16세기에 노브고로드 지역의 연간 다람쥐 모피 수출량은 50만 장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18세기 말에는 광활한 시베리아 숲에 살던 모피 동물들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아메리카 서부 개척의 일등 공신, 모피


북아메리카의 모피 사냥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도 예외가 아니다. 동부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유럽인들의 모피 동물 사냥은 얼마 안 되어 동부 지역 모피 동물들의 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시시피 너머 서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피 사냥은 백이들이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간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모피 무역은 인디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역의 대가로 백인들로부터 받은 술, 무기 그리고 덤으로 얻은 유럽산 질병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모피 무역 덕분에 유럽의 상인, 사냥꾼들이 인디언 거주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인디언들끼리도 모피를 팔아 산 총으로 모피 쟁탈 전쟁이 벌어졌다.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냥감은 설치류 중에 가장 큰 비버였다. 


158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비버 가죽 모자가 대유행이었다. 한때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번성하던 비버는 163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상류사회 사람들을 반드시 비버 모피로 만든 모자를 써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 대륙 전체가 비버 가죽 붐이 일었다. 


 Ⅲ. 보석


보석의 역사는 유대인으로부터


보석의 역사는 곧 유대인의 근대사이기도 했다.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이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에 보석 시장을 탄생시켰다. 


이후 보석이 최고의 재화로 등극하면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광맥이 발견되자 이는 축복이 아니라 악마의 저주로 변했다. 


보석을 장악하려는 제국주의 만행은 보어 전쟁을 유발해 보어인의 대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가져왔다. 


이를 취재하던 영국 특파원 존 홉슨이 쓴 제국주의론을 레닌이 받아들여 공산주의가 탄생했다. 


그 뒤 오랜 세월 동안 다이아몬드는 유대인이 주도하던 드비어스라는 독점 괴물에 의해 장악되었다. 


생산 유통 판매 재고관리라는 일체의 프로세스가 철저히 관리되고 인위적으로 공급량이 조절되어 시장에서 높은 가격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드비어스는 또 다른 유대인 레프 레비 에프에 의해 도전받고 그 독점 아성이 깨진다. 


여기에 더해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정부군과 반군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다이아몬드 쟁탈전이 일어나 피로 얼룩진 블러드 다이아몬드 참극이 벌어진다. 


유대인,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다. 


중세 유대인들은 항상 그들이 살던 곳에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방 시 손쉽게 들고 갈 수 있는 재화였다. 


좀 더 작고 값진 보석들이 제격이었다. 유대인의 오랜 방랑과 시련이 남겨준 지혜였다. 


주화는 편리하고 쓰기도 쉬웠지만 언제 어느 나라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주화를 다 모으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게다가 무겁고 강탈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웠다. 그러나 보석은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의 화폐 구실을 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대부업을 하면서 담보로 잡은 보석들이 많았다. 유대인들이 보석에 특화된 이유다. 


유대인과 보석의 특별한 인연


예로부터 보석은 모래가루에 갈아서 연마했다. 중세에 보석의 가치를 더하게 된 것은 14세기 말, 유대인들이 물레를 이용한 연마 기술을 발달시키면서부터다. 


그 뒤 최고의 보석 자리는 루비나 에메랄드 등 유색 보석들의 몫이었다. 15세기 중엽 이후 바르셀로나 유대인 보석상들에 의해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가공 기술이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로는 보석 거래 가운데서도 다이아몬드가 가장 이윤이 많이 남았다. 


독점 괴물의 탄생, 드비어스


로스차일드 자금으로 설립된 드비어스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은 1866년 남아공 오렌지 강 유역에서 21캐럿짜리 유레카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이 원석은 1년 후 파리 박람회에 전시되었고 이어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어 근대적 채굴 법이 채택되었다. 


이로써 대량 발굴된 다이아몬드는 널리 대중화되었다. 그 뒤 남아공에 다이아몬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 세실 로즈가 로스차일드가의 자금을 받아 1888년 드비어스 사를 설립해 아프리카 남부를 지배했다. 


드비어스는 원래 남아공 촌부인 원주민 형제의 이름이다.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형제는 남아공의 어느 농장을 50파운드에 매입했는데 우연히 그 농장에서 키운 농작물 밑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71년의 일이었다. 드비어스 형제는 뜻하지 않은 복덩어리 농장을 매입가의 무려 126배인 6,300파운드에 팔았다. 


더욱이 이 형제는 이 농장을 팔면서 농장의 명칭을 자기들의 이름인 드비어스 광산으로 영구히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오늘날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Ⅳ. 향신료


후추, 의료용으로 쓰이다. 


후춧가루 등 향신료는 경제사에서 상상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발, 마젤란의 세계 일주 등이 모두 후춧가루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동양의 향신료가 부의 원천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향신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했다. 


향신료가 언급된 5천 년 전 수메르인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방부 처리를 하려고 혼합 향신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3 천년경부터 이미 후추와 정향 등 많은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향신료들은 살균력이 있어 재료 저장에 필수품이었다.


또한 부패를 방지하는 효능은 그 향기가 병마를 퇴치한다고 믿게 되어 향을 피워 사용하는 용도로 쓰는 경우도 많았다. 


유럽인들은 왜 비싼 향신료를 그토록 선호했을까?


당시는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주식이 빵과 감자 그리고 소금에 절인 저장육과 생선 정도였다. 소금에 절인 염장식품에 신물이 난 귀족과 세도가들은 후춧가루를 친 신선한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또 맛없는 음식에 정향이나 육두구 같은 향료를 넣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육두구는 후추보다도 비싼 아주 귀한 재료였다. 영어 이름 너트맥은 사향 향기가 나는 호두라는 뜻이다. 고기 음식을 즐기는 서구인들은 고기 비린내를 제거하고 육류를 저장하는데 향료를 사용했다. 


또한 서양인들은 육식을 많이 해 몸에서 나는 체취가 문제였다. 이것이 조미료의 강한 향기를 요구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향료는 음식의 풍미를 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성욕을 돋우는 강장제와 의약품으로 여겨졌다. 특히 전염병을 예방하는 살균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부유층들이 앞다투어 샀다. 


전염병이 돌 때에는 후추가 악취를 없애고 소독하는 약품으로도 쓰였다. 


 Ⅴ. 석유


석유라는 이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기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석유를 뜻하는 영어 petroleum도 petra (돌)란 말과 oleum(기름)이란 라틴어 단어를 묶어서 만든 말로 돌에서 얻은 기름 즉 돌 기름이란 의미에서 붙여졌다. 


이렇듯 예전에는 석유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거나 지표면에 간혹 자연 분출된 것들이 소량 시중에 나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용도가 없었다. 


간혹 약국에서 상처를 치료하는데 바르는 연고로 쓰였다. 심지어는 두통, 치통 및 류머티즘 등 만병통치약으로 팔렸다. 


비셀, 유전 개발에 성공하다. 


월가의 주식 전문 변호사인 조지 비셀은 휴식차 방문한 고향에서 석유 샘플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연료로서의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약국에서 의약품으로 팔리는 석유를 조명용 기름으로 쓰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예일대학교 벤저민 실리먼 교수에게 석유 성분 분석 및 용도 조사를 의뢰했다. 그는 지하의 소금 광맥을 찾아내 뽑아 올리는 중국의 염정 굴착 기술을 동원하면 석유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1855년 4월 보고서는 석유는 다양한 물질로 분류될 수 있으며, 값싼 공정으로 램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기름도 얻어낼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 뒤 비셀은 보고서를 들고 투자자들을 모집, 펜실베이니아 석유회사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석유 시추 현장 책임자로 에드윈 드레이크를 고용했다. 그리고 소금 광산 주변부터 찾아보도록 시켰다. 보통 석유가 솟아나는 곳은 염정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쉘'의 창업자 마커스 사무엘


유대인다운 산교육


동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해 와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유대인 일가가 있었다. 


양친은 손수레에 잡화를 싣고 다니면서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 집에는 열한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특히 열 번째 아들은 머리가 좋고 활력이 넘치는 아이였지만 학교 수업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늘 성적이 떨어졌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유대인들은 한 시기를 매듭지을 때 반드시 선물을 하는 습관이 있다. 아버지의 축하 선물은 다름 아닌 아시아로 가는 배의 3등 선실표 편도 한 장이었다. 


돌아오는 표는 없고 목적지까지 가기만 하는 표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금요일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편지를 쓰라는 것과 아버지 자신도 나이를 먹었고 또 열 명의 형제자매가 있기 때문에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여행 중에 생각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18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혼자 배를 타고 인도 태국 싱가포르를 거쳐서 아시아의 끝으로 향했다. 도중에 내리지 않고 종착점인 일본 요코하마까지 갔다. 


그의 재산은 5파운드로 오늘날로 계산하면 10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기거할 집도 없었다. 


그는 쇼난이라는 해안에 도착해 빈 판잣집에 들어가서 처음 며칠 동안 지냈다. 거기에서 그는 이상한 것을 하나 보았다. 매일 일본 어부들이 와서 바닷가의 갯벌과 모래에서 조개를 캐고 있는 것이었다. 


직접 손에 쥐어보니까 굉장히 아름다운 조개였다. 그는 이런 조개를 가공하면 단추라든가 담배 케이스 등 장식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도 열심히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 


일본 세공품으로 성공하다. 


그는 조개껍질을 주워 단추와 커프스, 장난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개껍질 안쪽에 옻칠을 해서 문이나 책상을 장식할 수 있도록 세공품을 만들었다.


또 당시 일본의 민예품인 예쁜 조개껍질을 박아 넣은 작은 상자도 만들었다. 담배나 바느질 용품을 넣어둘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런던 사람들은 조개 장식을 진기하게 여겨 상자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일본에서 보내온 물건들이 인기를 끌자 아버지는 수입상품을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는데 금방 전문점으로 발전했다. 


이 청년이 마커스 사무엘이다. 


 마커스는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경유와 등유를 중국과 일본에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러시아와 거래를 시작하고 일본으로 석유를 운반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2갤런 깡통으로 운반했는데 원유를 운반하고 나서 선박이 더러워져서 운반 후에 배를 청소하고 씻어내는 일도 큰 문제였다. 


또 화재 위험도 커서 선박회사들이 원유 운반을 꺼렸다. 또 운반비도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마커스는 방법을 고안해 배 전체에 석유를 넣는 이른바 유조선을 고안했다. 그리고 1891년 세계 최초의 유조선 선주가 되었다. 


이 배가 완성되지 마커스는 이 배를 뮤렉스라고 이름 지었다. 그 의미는 뿔고둥이었다. 요코하마 해변서 조개를 주웠던 추억 때문이었다. 


훗날 그가 만든 회사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쉘 석유회사로 발전하게 된다. 


그가 조개 모양을 회사의 상표로 사용한 이유는 사무엘은 항상 자신이 어려웠던 과거를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글을 마치며 ]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인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는 결국 인간이 많이 사용하고 가지기를 원했던 제품이었기 때문에 물물교환의 주역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무역의 활성화에 기여를 한 것을 꼽으라면 결국 석유라는 생각이 든다. 


석유가 사용되기 위해서는 산업의 발전이 필수적인데 자동차의 보급이나 경공업의 발전 등 사회적인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으면 석유는 필수적인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석유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필요한 물건으로 사회가 발전해 나갔고 석유의 무역 활성화 덕분에 산업이 발전했고 국가별 경제 성장이 가능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석유가 스스로 무역을 발전시켰다고 생각이 든다. 


석유를 원활하게 이동시키기 위해서 유조선이라는 것이 발명되고 석유를 사용하기 위해서 자동차의 보급이 일어났다. 


석유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석유에서 추출한 다양한 재료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아스팔트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석유는 스스로 중요한 물건이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는 물건을 보면 특별한 감흥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다양한 사연이 그 안에 있고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 이야기 덕분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현상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도서 : 세상을 바꾼 다섯 가지 상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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