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andmer Mar 03. 2022

돈이 보이는 주식의 역사

과거를 통해 주식 시장의 폭락과 버블을 배워보자.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위기를 기회로 생각한 투자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바로 이론이나 경험을 통해 증권시장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다. 


주식투자 역사를 보면 증권시장은 매일 새롭게 변하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는 가운데 어떤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예전의 역사를 알아둔다면 현재의 상황을 과거와 빗대어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투자의 결정은 인간이 하는 행위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현재의 상황을 기준으로 미래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 우리나라의 주식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는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투자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알아보자. 


Ⅰ. 끊임없이 변화한 투자 기준의 변천사 기록


해방되고 나서 1960년대까지는 주식투자에 별다른 기준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명 책동전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매도세력과 매수세력이 양편으로 나누어져 돈과 물량으로 힘을 겨룬 결과가 주가로 나타났다. 


그야말로 기업가치와 무관한 투기적 거래였다. 


이후 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래프를 투자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개인투자자들이 EPS, PER, ROE, EV/EBITDA 같은 투자지표를 알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외국인 직접투자가 시작되고 나서부터이다. 


그러나 현대적 투자지표가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지금도 기업의 재료나 루머에 기대 주식을 거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객관적으로 모두가 같은 의미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역사란 현실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했다. 


우리도 과거 증시 역사를 통해 현재 증시를 이해하고 미래 증시를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과거 투자 사례를 보면 지금도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향후에도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Ⅱ. 국내 최초 선물 거래 


1900년대 쌀 콩 투기


인천 미두 거래소는 쌀, 콩 등 곡물을 거래하던 상설시장으로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1896년 5월에 설립되었다.


구조와 거래방식은 오늘날의 선물시장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모태로 불리는 인천 미두 거래소는 후일 증권거래소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거래대금의 10%만 내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 청산거래


인천 미두 거래소에서는 거래대금의 10%에 해당하는 증거금만 내면 누구라도 거래가 가능해 투기성이 매우 높았다. 


인천 미두 거래소의 가장 큰 특징은 쌀과 돈을 현물로 맞바꾸는 현물거래가 아니라 중간중간 반대매매로 차익을 실현하는 청산거래 방식이라는 점이다. 


청산거래는 실물 교환을 하지 않고 차액만 정산하는 일종의 선물거래 방식으로, 증거금만으로 매매할 수 있어서 레버리지가 높다. 


10% 증거금만 있으면 되니 레버리지가 10배에 이른다고 볼 수 있고 투기성이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인천 미두 거래소로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두 투기로 큰돈을 번 사람이 많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를 믿은 전국의 지주와 지방 부호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극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곤 대부분 패가망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미두 투기 바람은 광풍으로 이어져 논과 밭은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다 빼앗기고, 얼빠진 부자들의 낟곡과 돈뭉치는 미두 바람에 몽땅 날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Ⅲ. 땅 대신 받은 증권으로 신흥 부자 속출


지가증권 거래로 겨우 명맥을 유지한 해방 이후 증권시장


지가증권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법을 실시하면서 소작인에게는 농지를 주고 지주들에게는 농지값을 보상해 주기 위해 발행한 최초의 정부 발행 공채이다. 


이승만 정부는 16만 9천여 명의 지주에게 15억 2,400만 원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5년 분할 지급 조건으로 발행하였다.


이승만 정부가 대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행한 이면에는 자산의 대부분이 토지인 한국에서 지주들이 토지를 내놓는 대신 보상금을 받아서 기업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화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6.25 전쟁 이후 가격이 급등한 지가 증권으로 부자가 되다. 


그러나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 만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남쪽으로 피난 온 지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지가증권을 싼값에 내다 팔았다. 자연히 지가증권의 가격은 폭락할 수밖에 없었고, 부산에서는 액면가의 10%에 거래되기도 했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던 지가증권은 전쟁이 끝날 무렵 정부가 액면금액 전액을 일본인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가격의 액면가의 50%까지 뛰어올랐다. 


단기에 4~5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위기 때 더 많았다. 전쟁 중 지가증권을 매도한 지주들은 몰락했고, 국채를 헐값에 사모아 기업에 투자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다. 


  Ⅳ. 일본의 기업을 인수해 재벌의 발판을 마련한 SK, 두산, 한화


지가증권으로 일본인 재산을 사들이다. 


해방 후 정부는 일본인 귀속재산을 민간에 팔았다. 입찰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매각 가격도 매우 낮아 인수자들은 엄청난 특혜를 받은 셈이다. 


우리나라 초기 기업들은 이를 발판으로 자본을 축적한 경우가 많다. 


오늘날 SK그룹의 전신인 선경의 창업자 최종건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 주식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다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가자 그의 나이 21세 되던 1953년에 귀속재산을 인수받아 오늘날 SK그룹의 초석을 만들었다.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도 일본 기린맥주가 영등포에 세운 소화 기린맥주 공장을 해방 이후에 매입해 오늘날 OB 맥주로 성장시켰다. 


한화 그룹 창업자 김종희 역시 일본인 소유의 조선 화약 공판 직원으로 일하다 해방 후 1953년에 회사를 매입해 오늘날 한화그룹의 발판을 만들었다. 


지가증권은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온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Ⅴ. 원에서 환으로, 다시 환에서 원으로 바뀌다!


1962년 6월 10일에 통화개혁이 단행되었다. 원화의 가치를 10분의 1로 절하하고 화폐 호칭을 환에서 지금의 원으로 바꾼 통화개혁 조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로 단행된 통화개혁이었다. 


1차 통화 개혁 : 100원을 1 환으로


일찍이 1950년에 조선은행권을 한국 은행권으로 교환해 주는 통화개혁이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통화교환이지 통화개혁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공산군은 점령지역에서 인민권을 강제로 통용시키면서 미발행 조선은행권까지 남발했다. 


이에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자 정부는 조선은행권을 한국 은행권으로 교환해 주고 조선은행권 사용은 중단시켰다. 


첫 번째 통화개혁은 6.25 전쟁 직후인 1953년에 단행되었다. 전쟁 중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악성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원을 환으로 변경하고 100원을 1 환으로 변경하는 긴급통화조치였다. 


이 조치로 예금자와 현금을 보유한 사람들이 큰 타격을 받은 반면 귀금속이나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오히려 유리했다. 


통화개혁 초기에는 물가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56년부터 서서히 물가가 안정되어갔다. 


Ⅵ. 수많은 투기로 기록된 1960년대 주식시장


1960년대 주식 투기가 가능했던 데에는 시대적 배경이 한몫을 한다.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투자 대상인 상장기업 수가 적었다. 


1970년 기준 상장기업 수는 48개에 불과했고, 시가총액도 979억 원으로 1천억 원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도 주식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통되는 수가 극히 적었다. 따라서 투기꾼이 몇 천만 원만 동원해 주식을 매입하면 주가는 쉽게 급등했다. 


둘째, 투기성이 강한 청산거래가 이루어지는 등 시장 제도가 미흡했다. 


청산거래는 실물결제는 하지 않고 증거금만 내면 반대매매 형식으로 중간에 매매차익을 취할 수 있어 오늘날의 선물거래처럼 투기성이 강하다. 


그런데 공매도 공매수가 가능해 주가 등락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증권거래를 오늘날과 같이 전산으로 처리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처리한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시장을 관리하는 법과 제도마저 미비하고 허술했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투기가 판을 쳤다. 


셋째, 경제여건이 성숙하지 못했다. 


경제성장률이 높았지만 그만큼 물가도 높아 실질 경제성장률이 낮았다. 


고금리 고물가 상황에서는 장기투자가 큰 매력이 없게 마련이다. 시중금리가 22~28%에 이르고 사채금리는 40%를 넘는 상황에서 연 10% 전후의 배당 투자로는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Ⅶ. 위기이자 기회인 IMF 위기


IMF 외환위기는 왜 일어났을까? 


수익 위주가 아닌 외형 위주의 경영, 외부 차입금에 의존한 무분별한 문어발식 기업확장, 과도한 단기외채, 정부의 경직된 환율정책, 동남아 금융위기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96년 말 기준 상장 기업의 평균 부채 비율은 400%를 넘었으며, 1000%를 초과한 그룹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경상수지 적자에 따른 외환보유고 감소와 경직된 환율정책이다. 


IMF 외환위기가 도래하기 전 5년 동안 우리 경제는 경상수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 1996년에는 230억 원이라는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불경기에도 원화가치는 떨어지지 않고 고평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화가치 고평가는 결과적으로 국제경쟁력을 약화시켜 경상수지 적자를 가져왔고, 이는 곧 외환보유고 감소로 이어졌다. 


결국 고환율이 계속되면서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IMF 외환위기가 지나간 1998년 이후 800~900원이던 환율이 1,300원에서 1,600원이 되자 기업의 채산성이 높아져 4년 연속 적자를 내던 경상 수지가 1998년 403억 달러의 대규모 흑자를 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 글을 마치며 ]


주식 시장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큰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경제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왜 인상적이었는지 각각을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큰 기회를 잡았다는 것에서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지가증권 때문이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아무런 보증이 없는 상황에서 채권을 매입한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생각을 할 것이고 이 때문에 지가증권의 가격은 매우 낮게 형성이 된 것 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전쟁은 끝나고 이후에 지가증권이 큰 수익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당시 위기 상황이 자신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투자한 것이다. 


그 결과는 이들에게 엄청난 수확을 가져다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고려해본다면 투자의 세계에서는 대다수가 생각하고 쫓는 결과가 어찌 보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정답일지라도 그 선택은 큰 결과물을 가져다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이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두 번째는 경제의 큰 흐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IMF 사건을 되짚어 보자.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 우리나라의 고환율(1달러 = 800원)이 한 가지 원인이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저환율(1달러 = 2000원)로 전환이 되면서 IMF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근간에는 수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기업 경쟁력이 있었다는 점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환율이 주는 이점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의 무역수지가 개선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저환율이 될 경우 우리나라의 물가는 상승하지만 반면 국가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수출 산업은 호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경제는 한 가지가 개선이 된다면 한 가지는 개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 같다. 


이를 고려했을 때에 경제의 전체 흐름을 알지 못하면 투자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어 보인다. 


코로나 위기로 인해서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달러를 많이 풀어서 유동성이 많아져 경제가 회복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최근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늘어난 유동성으로 인해서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럼 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변화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고물가를 잡기 위해 유동성을 줄이는 선택을 했고 이는 고금리 정책으로 발전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채가 적고 현금 흐름이 풍부한 기업이나 가계가 많은 기회를 잡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플레이션은 화폐가치 하락이라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금을 마냥 들고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게 된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결국 경제 전체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가지지 못하면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더 많은 것들을 읽고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겠다. 


 참고 도서 : 돈이 보이는 주식의 역사


작가의 이전글 원자재 전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