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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Mar 24. 2022

유럽 명품 기업의 정신

천 년을 이어 온 유럽의 상도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2012년 기준으로 세계 500대 기업이 많은 나라를 국가별로 보면, 미국이 132개로 가장 많고, 중국이 73개로 2위이며, 일본이 68개, 프랑스 32개, 독일 32개, 영국 26개, 스위스 15개 네덜란드 12개, 캐나다 11개, 이탈리아 9개 순이다. 


한국은 13개로 세계 8위이다. 이중 유럽 각국의 세계 500대 기업은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3국 등을 모두 합치면 145개 사로 미국보다 많다. 


유럽을 아직도 주목해 보아야 할 이유다. 


미국이 현재 글로벌 기업이 가장 많고 시가 총액도 높아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으나 전통 명품 기업은 아직 유럽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유럽의 명품 기업들은 어떻게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지 시대적인 역사의 흐름과 변화의 과정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Ⅰ. 스위스 : 용병에서 시계, 제약 산업으로 


스위스의 루체른에 가 보면 빈사의 사자상이라는 석상이 있다. 바위의 벽면에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형성화시킨 것인데 사자의 등과 배에 부러진 창이 꽂혀 있다. 


이것이 바로 고향의 처자를 그리며, 숨을 헐떡거리면서 죽어가던 스위스 용병을 상징한다. 


이러한 스위스의 용병 수출은 18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즉,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스위스인은 용병 수출로 먹고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숨을 팔아먹고사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절치부심 고민한 끝에 새로운 산업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시계와 의약이다. 


16세기 후반에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이 스위스로 넘어왔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샤프하우젠과 쥐라 지방, 그들은 그곳에서 시계를 만들었다. 


시계 제작 기술을 가진 위그노들은 스위스인들에게 구세주였다. 스위스인들은 위그노들이 가지고 있던 시계 제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7세기가 되자 쥬네브에 시계를 거래하는 조합이 탄생했고 1845년부터는 시계 산업이 기계화되면서 생산량이 대폭 늘어났다. 


이때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계를 유럽의 각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인들은 배낭 가득 시계를 넣고 해발 5천 미터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에 내다 팔았다. 


작고 가벼우며 고부가가치를 지닌 시계는 한 배낭만 내다 팔아도 큰돈이 되었다. 


드디어 먹고살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알약도 만들기 시작했다. 제약 산업은 약초가 많은 스위스의 자연환경과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거기에 또 한 번 목숨을 걸어 제약 산업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세게 최고의 스위스 시계와 제약 산업의 출발점이다. 


다보스포럼은 지식 관광 산업


매년 1월에 개최되는 다보스포럼은 세계 최고 경영자들이 모이는 국제 행사이다. 다보스 시에서 주최한다 하여 다보스 포럼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에서도 대기업 회장들이 많이 참석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다보스는 인구가 1만 1천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로 스키장이 유명한 도시이다. 


다보스 시는 본래 스위스의 가난한 산간 마을이고 한겨울에는 폭설이 쏟아져 기껏해야 스키 관광이 고작이었는데 매년 다보스 포럼을 개최 회원 등록비 5만 2천 달러, 연회비 1만 3천 달러 참가비 2만 달러라는 돈을 받고 있다. 


현재 다보스 포럼은 전 세계의 VIP들을 끌어 모아 호텔 숙박은 물론 글로벌 대기업 회장들이 주최하는 각종 파티, 리셉션 등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다보스 포럼이 시작된 것은 1971년으로 출범 첫해에는 겨우 140명이 참가하여 비즈니스 이슈를 테마로 토론회를 개최하다가 이어 정치 경제 사회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고 70년대 중반에는 연 매출 7억 달러 이상의 세계 1천 개 대기업의 멤버십 제도를 만들어 연 회비 1만 3천 달러를 내는 고정 고객을 확보했다. 



 Ⅱ. 네덜란드 : 지킬 것은 지킨다. 


네덜란드 상인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부터 북유럽의 발트해에 이르기까지 생산되는 각종 수산물, 농산물 등을 중동 혹은 아시아 등의 생산물과 교환해주고 그 이익을 취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이 동방 무역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직접 동양의 여러 지역과 무역을 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한 시도로 우선 1594년 암스테르담에 원국 회사를 설립했고 동시에 첫 번째 무역 선단을 동양에 파견하였다. 


본래 동인도회사는 1600년경 세계의 무역을 주름잡던 영국이 제일 먼저 설립했다.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는 유럽의 무역 강국으로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영국이 먼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자 바로 2년 뒤에 네덜란드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네덜란드 정부는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을 계기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회사를 하나로 통폐합시키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에 처음 도착한 것은 1596년이다. 이어 1600년에는 상선 리브데호가 일본에 표류, 도착한 바 있고, 1602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된다. 


그들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목적은 동남아와의 향 시료 교역에 있었다. 당시 후추 등 수십 가지의 향신료는 유럽에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 포르투갈이 이미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그 해협 일대는 이슬람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무역선이 통과하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국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1603년에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서쪽 반덴에 무역 센터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동남아의 특산품이 후추, 커피, 면직물 등의 재료 확보에 나섰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역 회사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영향력도 강했다. 


1600~1700년에 이르는 100여 년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총 4,785척의 배에 수백만 명의 유럽인을 아시아 지역으로 수송해 주었으며, 도자기, 향신료 등 약 2천5백만 톤에 달하는 무역품을 유럽에서 실어 나른 것으로 되어 있다. 


  Ⅲ. 덴마크 : 혁신성이 강한 국가


덴마크는 춥고, 일조량이 부족한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유럽의 북쪽에 위치해 다른 지역과 교류도 별로 없었다. 


긴 겨울 동안 집 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자연스레 많아지게 되자 보다 편리하고 기능적인 제품들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리한 조건 때문에 덴마크에서는 인테리어와 가구 관련 산업, 그리고 디자인 산업에 발전하게 되었다. 


진취적인 장식장 제작자였던 프리츠 한센은 1872년 코펜하겐에서 사업자 자격을 얻어 자신의 가구 회사를 코펜하겐의 중심가인 크리스티안느 하븐에 열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고전했다. 


1930년대에 들어 고열 스팀으로 너도밤나무를 구부려 가구 제작을 시작했는데, 곡선형의 유연한 너도밤나무 가구는 그를 단숨에 유럽 가구 시장에 알렸다. 


1934년부터는 뛰어난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과 협력, 앤트, 세븐 시리즈, 그랜드 프릭스, 스완, 에그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가구 디자인사에 길이 남을 가구를 만들어 덴마크의 클래식 가구 디자인사에 길이 남을 가구를 만들어 덴마크의 클래식 가구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최상의 품질이 뒷받침된 기능적, 심미적, 자연적 아름다움은 프리츠 한센 가구의 특징이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시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 불변성, 독특한 디자인, 미니멀 디자인으로 인한 심플함, 독창성, 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뱅엔 올롭슨


뱅엔 올롭슨은 단연 세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는 스피커 제조 전문 회사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성형외과에 가면 대기실에서 흔히 대당 1억 원이 넘는 스피커가 2~4대가 세팅되어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그만큼 B&O 스피커는 한국 소비자에게도 익숙한 고품질 스피커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피커이기 이전에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는 B&O의 제품들은 최근 스피커뿐 아니라 LED 텔레비전과 스피커가 결합된 토털 가전에도 진출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B&O는 LED 텔레비전이나 스피커를 자체 생산하지는 않는다. 


LED 텔레비전 패널의 경우 삼성전자에서 수입하며 스피커 또한 자사 생산 제품이 아닌 타사의 스피커를 납품받아 새롭게 디자인하여 상품을 출시하는 기업이다. 


말하자면 B&O 자체가 스스로 생산하는 부품은 거의 없으며 납품받은 부품을 새롭게 디자인하여 구성하는 것이 B&O의 사업 영역이다. 


예컨대 삼성전자로부터 42인치 LED 패널을 공급받아 B&O 사가 디자인을 새로 한 후 선보인 벵엔올롭슨 LED 텔레비전의 경우 삼성전자의 같은 사이즈 제품보다 무려 5배 이상의 비싼 값으로 팔린다. 


그만큼 디자인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디자인만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아닌, 기능을 위한 디자인을 추구하라. 


B&O의 디자인 철학은 단순히 미적인 것이 아닌 실용성에 집중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B&O는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최첨단 디자인을 가미, 최고가의 제품을 생산한다. 


이것이 B&O의 장점이다. 심지어는 디자인의 경우도 하청을 주어 자기 자신들은 관리감독만 하기도 한다. 


따라서 B&O의 직원은 수백 명도 채 되지 않으며 거의 모든 것을 아웃소싱하고 있다. 


B&O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은 디자이너와 총무 회계부서 정도이다. 


이것이 덴마크 디자인의 힘이다. 이처럼 소국인 덴마크가 디자인 강국이 된 것은 디자인을 강조한 국가적 어젠다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Ⅳ. 영국 : 로열 워렌트의 권위


로열 워렌트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왕실에 물건을 납품하는 어용 상인을 보증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왕실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납품자의 성실성 등을 인정받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한 업체를 ㄹ선정하기 위한 로열 워렌트 협회의 모든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로열 워렌트라는 문장을 받기 위해서는 왕실 어용 상인 위원회에서 일단 품질을 인정받고 왕실에 3년간 무료로 제품을 제공해야 하며 5년 이상 꾸준한 거래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거래가 시작된 후 7년이 경과했을 때부터 심사 대상에 올려진다. 


이후 늘 최상의 품질과 왕실에서 필요한 만큼의 납품량을 제때에 공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등을 심사하게 된다. 


심사에서 통과를 하게 되면 체인 벌리 결의 법령에 의거하여 공식 로열 워런트 보유자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된다.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영국에서는 상업적으로 가장 명예로운 위치에 오른 것으로 인정되며 그 자신이 생산하는 제품 혹은 서비스의 질에 대해서는 영국 여왕이 이름을 걸고 보증한다는 뜻이 된다. 


로열 워렌트가 되면 일단 영국 소비자들이 신뢰할 뿐만 아니라 금융권에서도 신용등급 최상위권으로 분류된다. 


로열 워렌트가 되면 상당한 이익과 권위가 따라붙는다. 


영국 왕실의 공식 문장을 자사의 상표 포장 건물 차량 등에 부착할 수 있는 권리를 자동적으로 부여받게 되며, 또한 자신의 상행위로 인쇄되는 모든 포장지 혹은 공문에 바이 어포인먼트 투라는 문구를 사용할 수 있다. 


 Ⅴ. 프랑스 : 패션과 명품의 왕국


위그노란 종교 개혁에서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시기, 프랑스 내에서 활동하던 칼뱅파 신도를 말한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종교 개혁에 참여하는 다양한 시민들이 등장했는데 칼뱅의 등장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대다수는 칼뱅파에 가담했다. 


1559년 칼뱅 파는 파리에서 제1회 전국 개혁파 교회 회의를 열었고 신앙의 기본인 프랑스 신조를 채택한다. 

이때부터 프랑스 내 고유한 개혁파의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확산된 교회 개혁 운동은 정부의 탄압으로 수많은 망명자를 낳았다. 


당시 위그노들은 섬유 방직 기술과 같은 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술로 돈을 벌고 싶어 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위그노들을 가톨릭이 아닌 칼뱅파 신교도라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가톨릭과의 대립이 격화되어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프랑스 정부가 위그노들의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박탈하자 40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의 국외 탈출이 시작됐다. 


위그노들은 이웃의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리아 미국 아일랜드 등지로 대탈출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칼뱅과 위그노를 낳았던 프랑스 개신교회는 몰락하고 프랑스의 제철 염료, 화학 등 고도의 하이테크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위그노들이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었고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들은 증기기관의 기반 기술과 면방직 공업의 기틀을 마련해 주어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독일 역시 위그노들을 받아들여 철강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고, 미국의 경우 18세기 초 이민 온 위그노들이 탄약 기술을 가져오면서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기네스 맥주 역시 프랑스에서 아일랜드로 망명한 위그노의 후손이었던 윌리암 고셋이 효모 기술을 개발해 줌으로써 기네스 맥주를 세계적인 맥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였다. 


에르메스 패션 


에르메스 버킨백이 비싼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한 개의 버킨백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숙련된 장인 한 명이 버킨백 한 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18시간이다. 


에르메스의 숙련공은 주당 33시간을 일하므로 일주일 동안 일을 해도 두 개를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백 하나를 만드는 데 전 과정을 숙련된 장인 혼자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악어가죽의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을 경우 제품이 생산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버킨백은 사고자 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 


버킨백이 연간 제조되는 양이 700개에서 800개 밖에 되지 않으므로 물건을 공급받기 어렵기 때문에 신제품보다 중고품의 가격이 더 비싼 경우가 많다. 


신제품을 받기 위해 1,2년을 기다리기 싫은 소비자가 많다는 말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갖고 싶게 만들려면 그것을 손에 넣기 어렵게 만들면 된다. 


이 말은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소비자의 심리에 대해 던진 말이다. 


그러나 정작 에르메스 측은 이 말과 정반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에르메스 브랜드를 상품 표면에 절대 노출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고객들이 에르메스 가방이기 때문이 아닌 그 가방을 좋아하기 때문에 상품을 사길 원한다. 


 [ 글을 마치며 ]


덴마크의 가구와 프리미엄 브랜드의 전구들을 보면서 왜 덴마크에 이런 기업들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해소하게 되었다. 


덴마크는 긴 겨울 동안 집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가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고 이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구 디자인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잘 되는 맥락이었다. 


프랑스의 에르메스 백은 왜 이렇게 고가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제품의 생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보다 적은 제품을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에르메스의 경쟁력이라는 것도 알았다. 


영국의 황실에 제품을 납품하는 것은 개인의 영예와 함께 품질과 신뢰성을 모두 보장받는다는 것에서 많은 이들이 바라는 지위라는 것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가장 인상적이고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알게 된 사실은 스위스의 시계가 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원과 국토 인구 모두 부족한 상태에서 용병 외에는 해결책이 없던 나라로서 모든 것이 절박했는데 이때에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준 것은 프랑스에서 넘어온 위그노들의 기술력이었다. 


스위스는 이들의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시계를 만들기로 하고 이를 토대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나아가 산악 지형을 활용해 약초 재배에 집중해 제약산업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 단계에 이르자 더 나은 단계를 위해 교육산업에 집중했고 금융에서도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점을 부각해 현재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만 보게 되면 현재의 성공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알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역사적인 배경과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해가 쉽게 된다. 


앞으로도 보이는 것에 대한 이해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참고 도서 : 유럽 명품 기업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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