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도전과 경쟁을 즐기는가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이 세상이 이전투구의 장소가 된 것은 우리의 빠른 삶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인류 역사의 수천 년에 해당하는 부분을 망각한 결과다. 수명 문제 하나만 놓고 보자.
1900년 미국인의 기대 수명은 고작해야 마흔일곱 살이었다.
개척민들이 정착하기 전 미국 원주민 시대로 돌아가 보면, 기대 수명은 서른 살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평불만, 고층 빌딩에서 일하는 스트레스, 신용카드 빚, 북적대는 학교에도 불구하고 개발국의 기대 수명은 거의 여든 살가량이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이 우리 수명을 늘려주는 거라고 볼 수 없는가?
경쟁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열심히 일하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더 오래 일한다 등의 사실 말이다.
경쟁이 꼭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혹은 경쟁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를 돌아보면서 경쟁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살펴보자.
Ⅰ. 인간의 역사는 곧 투쟁의 역사이다.
우리 삶이 본디 에덴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황량한 모습일진대, 왜 사람들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으며, 유독 경쟁이라는 것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왜 사람들은 움막에 들어가 앉아 자연으로 돌아가야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만 행복하고 무욕할 수 있다고 믿을까?
불교도들은 아등바등 살지 말라고 한다. 우리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음식을 준비해주는 하인들이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과 진정한 자아를 찾으라는 말 모두 평화와 낙원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다.
에덴주의자들은 결코 존재하지도 않는 진화의 DNA 사다리를 거꾸로 내려오려 한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은 그저 이기적인 동물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 이기적 충동이 내재해 있긴 하지만, 늘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족벌주의 성향을 타고났다.
그리고 때로 명분을 좇아 이타적인 성향을 보일 때도 있다. 최근에 비행기 여행을 할 때 아이를 동반한 부모에게 먼저 본인이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그다음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워주라는 안전수칙을 읊어주는 걸 들은 것이 있는가?
부모는 아이부터 챙기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식에게 하듯 서로 이타적으로 대하는 세상을 떠올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과 어울려 볼링 치기
로버트 퍼트넘은 2000년에 나 홀로 볼링이라는 다소 우울한 제목의 베스트셀러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볼링 게임과 다른 사회적 활동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도표로 보여주었다.
그가 조사한 내용을 검토하고 수정 보완하면서 얻은 결론은 지난 20년 동안 널리 퍼진 사커맘과 사커대디 현상이 주말에 부모와 아이들을 함께 어울리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퍼트넘은 여기서 뭔가 다른 것을 찾아냈다. 오늘날의 남자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친구들이 줄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니, 가상 사무실이니, 린 생산방식이니 하는 것들 사이에서 같은 일터의 동료라는 이미지는 196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팹스트 블루리본 맥주의 흐릿한 광고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상품 중에 공동체 정서를 북돋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주택은 1970년대에 비해 50퍼센트 늘었다. 그러나 면적이 넓어졌다고 해서 1970년대보다 침실이 더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늘어난 공동생활 공간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웃과 어울린다.
에덴주의자들은 바비큐 장비를 갖추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 버거와 스테이크를 뒤집는다. 또한 에덴주의자들은 65인치 대형 TV에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어 친구들을 불러 먼데이 나이트 풋볼을 같이 보거나, 아메리칸 아이돌 최종 결선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늘어난 건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탐욕의 사회라는 것이 말 그대로 탐욕과 질시보다 더 긍정적인 것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시적 경쟁과 거시적 경쟁
미시적 경쟁은 한 개인이 다른 사람보다 더 앞서가려는 것이며, 더 나은 자신의 모습과 더 윤택한 삶을 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사무실에서 한 시간 초과 근무를 하는 직장인 그리고 손님이 우연히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직접 손님을 찾아다니는 판매원은 그런 의미에서 미시적 경쟁을 하는 것이다.
거시적 경쟁은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경제 체제와 관련이 있으며 사회 개별 구성원과는 관련이 없다. 사적 소유와 사적 이윤을 바탕으로 한 자유기업 체제에서는 두드러진 방식으로 거시적 경쟁을 부추긴다.
그런데 거시적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 체제는 없다. 거시적 경쟁을 유발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도 인민들은 당 지도자에게 잘 보이고, 식권을 더 많이 모으고, 모스크바 시내의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단, 소비에트 체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갖도록 만들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은 행복에 대해 그리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개흉 수술을 받아야 하는 심장병 환자는 자신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자기 없이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지, 행복에 관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된 들일을 하거나 찌는 듯한 대장간 모루에서 일하던 우리 조상들도 즐거움에 대해 그리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행복에 대한 강의를 차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듣거나 전자책 리더기로 내려받아 본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두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다만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행복에 대한 그런 탐구 자체가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여유 있다는 것을 반등한다는 사실이다.
행복한 사람일수록 더 정확한 사고를 한다는 또 다른 근거는 행복한 사람일수록 건강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행복이 중요한 까닭이 또 있다. 아주 단순한 이유다. 우리 대부분은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Ⅱ. 부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는 이유
만약 세계가 다람쥐 쳇바퀴 경주장이라면 왜 그토록 돈 많은 사람들이 그리 오랫동안 일하는 걸까? 그들이야말로 더 많은 휴가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소득자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 보면, 그들이 스파에서 보내는 시간은 눈에 띌 정도로 적고, 사무실에 머물거나 출근하기 위해 보내는 시간은 아주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콘래드 힐튼을 예로 들어보자. 콘래드는 남들이 은퇴하고도 십 년이 더 지난 나이인 일흔여섯에도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들이 여정을 풀 수 있는 호텔을 세우느라 바쁘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전 세계 호텔 체인망이다. 그의 호텔이 내세우는 것은 최고로 편안한 침대였지만, 콘래드는 거기서 눈을 붙여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부자였고 유명인사였다. 그리고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훨씬 행복해 보였다.
이런 모습은 비단 거부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광범위한 조사에 의하면 고소득자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일한다. 그들이 요령을 몰라서 그리 많은 시간을 일에 투여하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학원 교육을 받은 사람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더 오래 일하고,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더 오래 일한다.
지난 몇십 년 사이, 50시간 이상 일하는 대학 졸업자의 비율이 37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최상위 소득자들은 하위 20퍼센트보다 두 배 이 상 오래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벌만큼 벌면 일하는 시간보다 여가 시간을 늘릴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일을 줄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랫동안 소득세율 인하를 반대해온 사람들은 감세를 하면 사람들이 일을 덜 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휴가 시간을 길게 얻는 것은 직장에서 원하는 것 가운데 가장 아랫 순위에 든다.
왜 부유한 사람과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할까? 왜냐하면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데 필요한 자기 제어 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국 자기 일을 좋아한다.
1990년대에 헤지펀드 자문회사를 운영하면서 전략적 실수를 범한 바 있다. 당시 경제 금융시장 정치를 하나로 묶은 일간 분석 보고서를 발행했다.
우리 고객은 골드만 삭스와 모건스탠리의 포트폴리오 최고 담당자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보고서를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에겐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매일 시달려야 하다 보니 진이 빠져버렸다. 나는 그 압박감을 덜어내고자 직원들을 격주로 금요일마다 쉬게 했다.
직원들은 일정을 따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휴가를 떠나기로 되어 있던 직원이 출근 금지 반대를 외쳤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경력을 쌓고 싶어 했고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들이 없어도 된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그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힌 셈이었다.
Ⅲ. 금리가 인간을 화합하게 한다.
1970년대 베트남과 같은 지역들을 예로 들어보자.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그 나라의 경제는 대파국의 함수 곡선을 그리며 급격히 자가 붕괴된다. 몰락을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
무력 때문도 아니며, 자유가 억압받아서도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상거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체제에서 쌓았던 자신의 신용이 더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직하게 행동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신용을 뜻하는 Credit이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믿음을 의미하는 trust가 있다. 사회 혹은 국가가 붕괴되면 거의 모든 사업이 갑자기 뜨내기 사업으로 바뀐다.
사람들은 다음 해 혹은 다음 달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이공을 탈출하는 마지막 헬리콥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금리가 떨어질 때
경제학자로서 내가 찾은 최고의 시간 측정 단위는 현행 이자율이다. 이자율이 높으면 내일에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지금 투자할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업 관점에서 보면 이자율이 높을 때 투자 지출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경우 장애율 hudle rate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이자율이 낮으면 당장 투자해야 한다. 나중에 더 큰 대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반 독일에서 초인플레이션이 있었을 때, 물가와 이자율이 한 시간 간격으로 뛰었다. 종업원이 커피를 따르는 순간 커피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오전 10시에 교수가 월급을 받으면 수표책을 들고 운동장으로 내려왔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친지들이 수표를 받아 들고 바로 생필품을 구하려 갔다.
이와 비슷하게 짐바브웨에서 일어난 초인플레이션은 경제 체제에 중성자 폭탄을 터뜨린 것과 다름없다.
신용 평가 시스템이란 곧 경쟁 시스템의 일종이다. 사람마다 혹은 사업마다 신용 리스크는 다른 법이다. 그런 까닭에 IBM은 5퍼센트의 이율로 대출할 수 있지만, 도박과 호텔업을 하는 MGM 미라지는 11퍼센트의 이율에 정크 펀드를 발행할 수밖에 없다.
이자율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즉 내일이 기대가 되는 사회일수록 발전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물질적으로만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GDP 기준으로도 그렇다.
우리는 시간이 관건이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쓴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에서 시간이야말로 정말 관건이다.
발전과 전진을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엔트로피 (무질서) 상태에 빠져들고, 그것을 지탱할 중심을 사라진다.
앉아서 생활하면 빨리 늙는다?
경쟁 사회는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뉴런을 파괴하고 알츠하이머와 심장병을 유발함으로써 우리를 서서히 죽인다고 한다.
영국에서 2401쌍의 쌍둥이를 연구한 바에 따르면, 앉아서 생활을 많이 할 때 노화가 빨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 순간 우리의 세포는 분열하며 염색체 말단 소립은 줄어든다. 말단 소립은 염색체가 분해되는 것을 막는다.
말단 소립이 크게 짧아지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쌍둥이 가운데 게으른 쪽은 그렇지 않은 쪽보다 백혈구 말단 소립의 길이가 짧았다.
이 말은 게으른 쪽 쌍둥이의 세포 분열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더 이상 세포 분열을 할 수 없으면, 우리 신체는 알츠하이머와 같은 노화와 관련된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말단 소립은 무덤으로 가는 카운트다운 시계와 같다. 그 시계는 스트레스가 너무 커도 빨리 가지만, 너무 작아도 빨리 간다.
Ⅳ. 풍부한 자원의 저주, 악마의 배설물
베너수엘라와 한국을 비교해보자. 한국은 검은 황금이라든가 반작이는 14캐럿 황금도 없다. 세계 5위의 원유 수입국이며 세르비아보다 금 매장량이 적다.
한국은 베네수엘라보다 가난한 나라였으며 아이티 수준이었다. 그런데 2012년 한국의 생활 수준은 서유럽 국가 생활 수준과 견줄 정도다. 산유국이 아닌 한국은 인재와 근면밖에 믿을 것이 없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가 쏟아지는 것만 바라보며 돈을 허비한다. 1970년대 베네수엘라의 석유장관은 석유를 가리켜 악마의 배설물이라며 석유가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방대한 자원이 발견되면 사람들이 가진 경쟁 의지가 꺾이고 부를 창출하기 위한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이런 사실은 경쟁이니, 탐욕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다.
너무도 자주 사람들은 탐욕의 원인이 경쟁이라고 오해했다. 진정한 위협은 정부가 나서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굳이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소모시키는 데서 비롯한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전제적이며 가부장적 정부의 조합만큼 우리의 정신 건강에 치명적인 조합은 없다. 이런 조합일 때 풍요로움이 궁핍으로 바뀐다.
풍부한 자원이 경제와 사람을 망치는 길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적인 문제에서 비롯하는 것도 있다.
첫째,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는 자국 화폐의 환율 강세를 반기는 경향이 있다.
잘 사는 이들은 그런 상황을 이용하여 프라다 의류를 구매하고 프랑스 샤모니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노다지나 유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지역 군벌이 수중에 넣어 사회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
1990년 여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유정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사실을 떠올려보라.
셋째, 원유와 같은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나라는 국가 운영이 족벌 운영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 되면 똑똑한 인재들이 족벌 운영에 발을 담가야 하고 선도적인 대학은 다른 것 제쳐두고 그에 필요한 지원만 하게 된다.
Ⅴ. 우리는 경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오늘의 삶을 사는 데는 분명히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우리가 경쟁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모두가 이불 속에 들어가 굳이 나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옛 소련과 같은 사회로 갑자기 떨어질 수 있다.
경쟁도 없고,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으면, 행복도 없다.
비록 경쟁이 치열하더라도 그런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 지난 10년 사이 수억 명에 달하는 중국인과 인도인은 자기 배를 불리는 법을 알아냈다. 어릴 때 우리는 어른들에게 이런 얘기를 듣곤 했다.
음식을 남기지 말거라. 중국의 아이들은 굶고 있는데. 이제 중국의 그 아이들은 우리가 먹는 것과 같은 식사를 한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인이 더는 패자의 몰골을 하지 않고 경쟁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덩샤오핑이 고개를 끄덕여준 덕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은행에 원조를 요청하거나 돈을 빌어야 했던 아시아의 농부들이 배를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신들을 위해 곡물을 심고 사냥을 하고 돈을 벌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것만이 가난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 글을 마치며 ]
경쟁이라는 부분이 피로감을 유발하는 것을 사실이지만 그 피로감은 때때로 자극이 되어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때도 있다.
자신만의 만족을 위해 치열한 노력을 통해 예술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들도 많다.
이럴 경우 경쟁은 자기 자신의 발전이 되어 현재보다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준다.
하지만 경쟁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버리면 쓸데없는 것에도 힘을 빼버리고 정작 중요한 것에는 집중하지 못해 개인의 경쟁력이 줄어들게 된다.
이 때문에 삶에서 항상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자신이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구분해 내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아가 바람직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갈고닦으면 어떤 도전이 온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에만 의식해 경쟁의 본질이 어떤 것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망각해 버리면 그 경쟁에서 남는 것은 상당한 피로감일 뿐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우리는 경쟁이라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삶이 지치고 힘든 것은 아닐까 싶다.
어떤 것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분명 다른 어떤 것은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좀 더 시간을 쏟고 노력을 하면서 스스로의 경쟁의식을 불타오르게 만들고 새로운 도전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목적 없는 도전,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경쟁에서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일 뿐이다.
이 때문에 경쟁을 도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삶에 어떤 도전이 있고 그것을 성취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담금질하는 것은 바람직한 경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 도서 : 러쉬!